"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가 옛말이 될 때
우리는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것인가.
1930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흥미로운 예언을 남겼습니다.
"100년 뒤, 인류는 기술의 발전 덕분에 주 15시간만 일하고도 풍요롭게 살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인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여가를 보낼 것인가'가 될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0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케인스의 예언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생산성은 폭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더 바쁘게 일합니다. 그런데 생성형 AI의 등장이 이 판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로 인간의 '일자리'가 증발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산업혁명이 인간의 '근육'을 기계로 대체했다면, AI 혁명은 인간의 '두뇌'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를 쓰고, 코딩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진단을 내리는 '지적 노동'. 우리가 그토록 고귀하게 여기며,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해서 이런 일을 해야지"라고 가르쳤던 그 영역들이 알고리즘의 손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서늘하고 철학적인 질문이 던져집니다.
"평생을 '성실함'과 '능력'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우리 3050 세대는, 일이 없어진 세상에서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할까?"
오늘은 단순한 '실업 대란'을 넘어, AI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존재론적 위기'와 '새로운 인간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챗GPT 사용법을 배우는 것보다 백배는 더 중요하고 시급한, '영혼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 유발 하라리의 경고: 착취보다 무서운 것은 '무관함'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AI 시대에 가장 두려운 계급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무용(無用) 계급', 즉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습니다.
20세기까지의 사회 문제는 '착취'였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쥐어짜는 것이 문제였죠. 역설적으로 이는 노동자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파업을 하면 공장이 멈추니까요. 하지만 AI 시대의 공포는 착취가 아닙니다. '배제'와 '무관함'입니다.
AI와 로봇이 생산의 주체가 되는 세상에서, 대다수의 평범한 인간은 시스템에 기여할 방법이 사라집니다. 경제적으로는 기본소득으로 먹고살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당신은 우리 사회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라는 선고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공포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존재감의 상실'입니다.
특히 한국의 3050 남성들에게 이 공포는 치명적입니다. 우리는 "어디 다니세요?"라는 질문에 회사 이름이 박힌 명함을 내미는 것으로 나를 설명해 왔습니다. "김 부장", "이 과장"이라는 직함이 곧 나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함이 사라진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은퇴한 베이비부머 세대가 겪는 우울증, 소위 '젖은 낙엽 증후군'이 이제 전 세대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갈 곳이 없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는 삶. AI가 모든 것을 더 잘 처리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느낄 무력감. 이것은 경제적 빈곤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의 빈곤'을 초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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