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전적기념관과 남원 강석마을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할 때 이따금 '쌍팔년도'라는 말을 쓴다. 간혹 1988년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단기 4288년의 '88'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단기 4288년이면 서기 1955년으로 한국전쟁 휴전 직후였다.
1950년대는 어느 때보다 살아가기 힘든 시기였고 그때를 회상하며 쌍팔년도라고 부른 것이다. 쌍팔년도인 1955년, 정부가 하나의 선포를 내놓기도 했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완료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게 바로 그것이다.
지리산의 빨치산
지리산은 1967년 우리나라의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영호남에 넓게 퍼져 있는 산자락은 그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이중 남원 쪽에서 올라가는 뱀사골 탐방로 초입엔 국방부가 1979년에 만든 '지리산전적기념관'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이 기념관에는 한국 전쟁 전후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에서 활동했던 빨치산 그리고 이를 소탕하기 위해 작전을 펼친 군경에 대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많이 알려졌듯이 빨치산이라는 말은 비정규 무장군을 뜻하는 '파르티잔(partisan)'에서 왔다. 해방 이후 대구 폭동 사건 등으로 인해 미군정은 좌익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때 탄압을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온 이들이 빨치산의 시초였고 처음에는 야산대라고 불렸다. 1948년에는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 명령을 받았던 14연대 장병들이 동포를 학살할 순 없다며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다. 이들이 나중에 지리산 야산대로 합류하면서 빨치산의 무력은 더욱 증가한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은 남한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뒤집힌다. 여기서 북으로 돌아갈 퇴로가 막힌 남부 지역의 북한군과 지역 좌익 인사들이 무장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대거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한국전쟁 이전 빨치산을 구빨치산, 전쟁 발발 이후의 빨치산을 신빨치산이라고 불렀다. 한때 이들의 세력은 수만 명에 달할 정도로 매우 커서 여러 곳에 해방구를 만들어 직접 통치할 정도였다.
빨치산이 후방에 남아있는 것은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UN군사령부는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11사단을 1950년 8월 27일 경북 영천에서 창설했다. 이후 편성을 완료하고 작전 수행을 위해 남원으로 이동한다.
11사단의 '토벌'
사실 한국전쟁 전후로 수많은 지역들이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던 한국군은 보도연맹원과 좌익 인사들을 예비검속이라며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그리고 인민군은 점령한 지역의 우익인사들을 다시 살해한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수복한 이후엔 다시 부역혐의를 받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이중에서도 지리산 지역의 주민들은 낮에는 토벌대, 밤에는 빨치산에게 끼어 계속 고통을 겪어야 했다. 어느 한쪽을 편드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공포의 시대였고, 그 때문에 숱하게 죽어야 했다.
11사단의 토벌 작전으로 빨치산은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1951년 4월 2일 정재완 의원의 국회 발언을 보면, 토벌 작전은 정부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사단과 특별 경찰대가 합동하여 3월 내로 패잔 산군(山軍)을 완전 소탕하겠다고 하였으나 그 실은 병력의 부족과 투지의 불충실로 말미암아 계획대로 추진 못 되었다."
11사단 작전의 기본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리한 작전으로 다수의 민간인 희생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전남 함평의 월야, 해보, 나산 등지에서 공비를 색출한다면서 주민 524명을 학살했다
11사단의 최초 작전지였고, 그래서 지리산전적기념관이 있는 남원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강석마을(남원시 대강면 강석리)의 그날은 매우 충격적이다.
마을에 일본도가 번뜩이던 날
강석마을은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고즈넉한 곳이다. 1950년 11월 16일 후생 사업(식량 등 각종 생필품을 주민들에게서 얻는 것)을 위해 일부 빨치산이 근처 송내마을로 내려왔다. 이들은 금지면으로 이동하다가 11사단 예하부대를 맞닥뜨렸고 교전이 벌어졌다. 송내마을 주민들은 강석마을로 피신한다. 그리고 이중엔 일부 비무장 빨치산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빨치산을 쫓아온 토벌대는 11월 17일 새벽에 총격을 퍼부으며 강석마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토벌대가 온 걸 알게 된 빨치산과 좌익 협조자들은 재빨리 마을을 빠져나와 순천 방향으로 도주했다.
마을에 진입한 토벌대는 윽박지르며 주민들을 모두 마을 앞 논으로 불러냈다. 서리가 잔뜩 내린 새벽부터 급하게 나오다 보니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속옷 차림에 맨발로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주민들은 추위와 공포에 덜덜 떨면서 논바닥에 서 있었다. 군인들은 송내마을에서 온 사람들이나 18~40세 사이의 남성 등 지극히 임의적인 방식으로 빨치산 협력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참혹한 일이 벌어진다.
군인들은 우선 성인 남성 10명의 눈을 천으로 가린 채 마을회관 인근 집 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몇몇 군인들은 가지고 있던 빨간 보자기를 풀었는데, 그 안에서는 날이 시퍼런 일본도가 나왔다. 군인들은 그 일본도로 사람들의 목을 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목이 잘린 시체에 소금을 뿌렸다. 참수당한 사람들은 모두 인근 송내마을에서 피난 온 사람이거나 빨치산이 잠시 머물렀던 집의 사람과 머슴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김정동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 한 증언에 따르면 한 장교가 김정동의 목을 내리쳤으나 잘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내리쳤고 총 세 번의 칼질을 했다. 이렇게 김씨는 목이 절반 가까이 잘린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참수형에 이어 토벌대는 6명의 여성을 마을 뒷산으로 데려가 살해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18~40세의 남성 45명을 그럭재 방향으로 끌고 가서 한 논에서 무릎을 꿇린 뒤 총살했다. 이날 토벌대가 이 마을에서만 학살한 주민은 90여 명에 달했다.
쌍팔년도, 단기 4288년 4월 1일의 공비 토벌 완료
11사단이 빨치산 토벌 작전 중 자행했던 민간인 학살은 강석마을뿐 아니라 주천면, 산내면, 산동면 등 곳곳에서 벌어졌다. 1950년 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남원에서만 140여 명 이상이 희생됐다.
이후 11사단은 전선으로 이동하고 8사단이 임무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사령부를 설치했다. 백야전사령부는 빨치산이 가장 취약한 계절인 겨울 동안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펼치기 위해 군인과 경찰을 함께 묶은 임시조직이었다. 이 사령부는 1951년 12월부터 1952년 3월까지 활동했다.
이런 군경의 집중적인 토벌로 인해 빨치산은 급격히 와해됐고, 단기 4288년(1955년) 4월 1일 부로 지리산 공비 소탕을 완료했다는 공고 표지판이 세워진다. 표지판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었다.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히 섬멸되었습니다.
단기 4288년 4월 1일,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백
표지판의 문구처럼 쌍팔년도에 지리산과 그 인근 마을들은 정말 평화의 땅이 됐을까? 오히려 유족들에게는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그들은 평생 동안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자신들이 겪었던 끔찍한 일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지리산전적기념관 근처에는 토벌 작전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위령탑과 조형물도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강석마을에는 2011년에야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가 세워졌다. 그 대비되는 규모가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듯하다. 과거의 잘못을 들출 때마다 나오는 '공과 과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주장은 왜 나라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걸까?
[참고자료]
강석마을, <강석양민희생자위령비>(비문 내용 참고)
이태, <남부군, 최초로 공개된 지리산 빨치산 수기>, 두레
임송자(2020), <한국전쟁기 전남지역 빨치산 활동과 지역민>, 동북아역사논총, 67: 273-322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 1948, 여순항쟁의 역사>, 흐름
진실화해위원회, <남원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진실화해위원회, <남원지역 적대세력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