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과 완도, 나주경찰부대의 민간인 학살
영화를 보다 보면 특수 임무를 맡은 주인공들이 적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잠입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들의 정체가 발각되면 곧장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기에 높은 긴장감을 준다. 그러다 결국 희생을 무릅쓰고 임무를 완수하는 모습에서 관객은 감동과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반대로 적군이 아닌 자국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이런 위장 전술을 펼치는 영화라면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아마 말도 안 되는 스토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한국 전쟁 당시 해남과 완도 일대에서 실제로 발생했다.
인민군의 남하와 경찰의 후퇴, 나주경찰부대의 시작
인민군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이후 7월 13일에는 예산, 7월 25일에는 광주까지 내려온다. 이에 전남 서남부 지역 경찰들은 육로로 부산까지 후퇴하기로 한다. 하지만 인민군에 의해서 육로가 차단당하자 해로로 철수 경로를 변경한다. 이중에는 나주에서 퇴각하는 경찰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나주경찰부대'로 불렀다. 나주경찰부대는 배를 타기 위해 해남과 완도로 이동한다.
전쟁 중에 중요한 정보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집단은 군·경과 행정관료, 지역 유지 등이다. 인민군의 남하 소식에 해남 경찰과 군수는 7월 23일에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신했고, 일부 지역 유지 가족들은 대흥사로 피했다. 완도 경찰과 군수 역시 7월 24일 완도를 떠났다. 주민들만 남겨져 피난 여부에 대해 우왕좌왕하면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해남 경찰은 이미 갈매기섬과 지역 곳곳에서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수백 명을 학살한 뒤에 철수했다. 이를 본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인민군이 코앞까지 왔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니 주민들은 지역 내로 새로 들어오는 병력은 당연히 인민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오해와 오인을 불러왔고, 비극으로 이어진다.
해남 마산면 상등리
7월 25일, 나주경찰부대는 우슬 저수지에서 전열을 정비한다. 그리고 200여 명의 병력을 네 방향으로 쪼개어 포위하듯이 치안 공백 상태의 해남으로 들어왔다.
제일 처음 도착한 곳은 해리였다. 총을 든 부대를 본 일부 주민들이 놀라서 도주하자 경찰들은 이들을 쫓아가 사살한다. 주민들은 경찰들이 인민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주민들은 다급하게 '인민군 만세'를 외쳤고 나주경찰부대는 이들을 사살한다.
이후 경찰들은 구교리, 수성리, 신안리 등에서도 주민들을 사살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은 주민들이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산면 상등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경찰들은 기관총을 거치한 차량을 타고 마을에 들어오면서 '인민군이 오니 마을 회관 앞으로 빨간 완장을 두르고 환영 나오라'는 방송을 한다. 그러자 주민 수십 명이 마을 입구에 모여 인민군 만세를 불렀다. 나주경찰부대는 이들을 향해 자신들이 경찰이라는 것을 밝히며 기관총을 쐈고, 6명이 희생됐다.
나주경찰부대는 이 마을에 25일부터 27일까지 있으면서 좌익사범 색출을 명목으로 9명을 더 살해해 희생자는 총 15명이 됐다. 이때 여성 희생자 4명 중 3명은 대살(代殺)이었다. 젊은 남자들이 색출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몸을 피했던 남자들을 대신해 그 배우자와 가족을 죽인 것이다. 이 외에도 경찰들은 해남 곳곳에서 가택수색까지 하며 주민들을 사살했다.
완도 중학교에서 열린 환영대회
나주경찰부대가 해남을 휩쓸던 7월 25일, 선발대 12명은 완도로 진입한다. 선발대는 완도로 진입하기 전 상황 파악을 위해 완도경찰서로 전화를 건다. 이때 당시 경찰서와 인접한 완도중학교의 한 교사가 전화를 받는다. 그러자 경찰은 자신들이 인민군이고 곧 완도로 들어가니 환영대회를 준비하라고 한다.
전화 통화 이후 완도중학교에서는 교사들을 중심으로 환영대회를 준비했다. 7월 26일 아침부터 완도경찰서 소사가 읍내를 돌아다니며 인민군 환영대회 참석을 독려한다. 그렇게 약 200~300명 사람들이 완도중학교 운동장으로 모였다.
경찰들은 하얀 띠를 둘러 경찰 표식과 신분을 가리고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러나 곧 띠를 풀고 자신들이 경찰이라고 밝혔지만, 주민들은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다. 진짜 경찰인가, 아니면 인민군이 반동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인가. 이미 수많은 죽음을 겪었던 주민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한 청년이 계속 인민군을 환영한다고 하자 경찰은 청년을 향해 총을 쐈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경찰은 이들을 쫓아가며 총을 쐈다. 그리고, 일부는 체포해 완도경찰서에 구금하고 해남으로 복귀한다. 이때 잡힌 사람들은 인민군이 들어오자 풀려난다. 하지만, 나중에 완도가 수복된 이후 돌아온 지역 경찰들이 이들을 다시 체포해 사살한다.
나주경찰부대는 이후에도 인근 섬을 돌면서 여러 차례 자신들의 신분을 숨겼다. 그리고 인민군으로 오인하는 주민들을 좌익이라며 사살한다.
나주경찰부대는 진짜 인민군으로 위장했는가?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규모는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기준으로 해남군 55명, 완도군 42명이다. 하지만, 실제 규모는 이보다 더 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경찰들이 자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위장 전술을 펼쳤다는 믿기 어려운 상황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일단 나주경찰이 인민군으로 위장한 것을 목격했다는 다수 주민들의 증언이 있다. 거기다 경찰청에서 펴낸 '과거사조사위원회 보고서'에도 경찰들이 인민군으로 위장했다는 나주경찰부대원의 증언이 등장한다. 반면에 인민군으로 위장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인민군 복장과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실제로 나주경찰이 인민군의 복장과 장비까지 착용하며 위장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나주경찰은 인민군과 제대로 된 전투 없이 계속 퇴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민군의 장비를 획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거기다 주민들은 한 번도 인민군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여기에 나주경찰부대는 오랜 퇴각으로 인해 그 행색이 매우 남루했다. 그리고 인민군이 곧 들어온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상태였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새로 들어온 나주경찰부대를 인민군으로 오인하게 된다.
하지만, 나주경찰부대는 이런 주민들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신분을 나타내는 비표 등을 적극적으로 감추고 스스로 인민군이라고 속인다. 이렇게 주민들의 오해를 유도했고, 이를 빌미로 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들이 단순히 인민군 복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위장하지 않았다'라고 할 수는 없다.
머릿속에 떠오른 한 단어
어떤 이들은 나주경찰부대의 위장에 대해 지역 내 정황 파악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합리화한다. 하지만, 인민군은 경찰의 뒤에 있었다. 또한, 지역 내 좌익세력이 존재했지만 200여 명이나 되는 무장 부대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은 이미 지역 경찰들이 철수하기 전 보도연맹원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살기 위해 눈치를 보고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나주경찰부대는 이를 교묘히 이용해 덫을 놓은 것이다.
학살 현장에서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봤다. 인민군 환영행사라고 해서 모인 곳에는 총을 든 사람들이 서 있었고 자신들이 인민군이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만세를 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안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민군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경찰이라며 총을 겨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은 곧 상황을 파악하고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도망친다. 경찰들은 그 뒤를 쫓아가며 조준 사격한다.
이런 장면들을 그려보던 내 머릿속에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그 단어는 바로 '사냥'이었다.
[참고자료]
경찰청,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면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
박찬승(2012), <한국전쟁 전후 해남군에서의 민간인 학살>, 구술사연구, 3:1, 7- 45
진실화해위원회, <나주경찰부대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