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함부로 평가하지마라
우리 안에는 여러 모습이 있어 상황에 따라 하나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혹은 여러개의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기도 하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반경에 위치해있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하필 어떤 상황에서 드러낸 하나의 모습. 사람들은 오로지 그것만을 단서로 저마다 그를 평가한다. 그를 안다고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의 생활의 고작 1%만 아는 사람들이 그를 마치 잘 안다는 듯 평가한다.
“너는 정색을 잘해. 왜 이렇게 정색해?”
그들에게 그는 ‘정색 잘하는 사람’. 더 나아가서는 ‘뭐만 하면 정색하는 까칠한 사람’. 그는 그런 모습을 지닌 사람인 것이며, 그러니 조심해야 하는 혹은 멀리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것 없이 그게 그의 전부가 되어야만 했다.
어쩌다가 다른 이들의 농담에 웃으며 맞받아치기라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이렇게 의심한다.
“저 정색 잘 하는 애가 오늘따라 왜저래? 오늘은 정색안하네”
가정부터가 모순인 것. 그들은 그를 ‘정색’이라는 단어로 묶어두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것을 유지해야만 하는 사람. 정도로 판단한다.
그들의 도 높은 농담에 불쾌함을 드러낸 것을 그들은 ‘불쾌감’이라는 감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동시에 그런 그의 감정을 부정할 수 있는 단어를 가져온다. 그 단어는 ‘정색’이라는 말로 탈바꿈된다.
그의 다른 모습에 있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걔는 그런 모습 없는데”라는 반응과 함께 ‘아니다’라는 격한 부정을 들이밀며, 그런 부정의 근거를 오직 자신의 하나의 경험에서 혹은 같았던 상황 속에서만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정색하는 모습”은 ‘그(someone)’만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으며 ‘그들(people)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정색’하는 ‘모습’을 내면에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들이 처한 특정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정 상황’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령, 누군가에게 ‘돼지’라는 별명을 붙이고 그 별명을 계속 부른다고 생각해본다. 어느 한 사람은 반응이 없을 수 있으며, 어느 한 사람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반응이 있다면 어느 한 사람은 ‘별명’이 생겼다는 것에 집중해 그것을 자신의 유일한, 고유한 ‘별명’으로 삼을 수도 있고, 어느 한 사람은 ‘돼지’에 집중해 ‘돼지’가 불러오는 연상과 특징적인 것이 자신에게 콤플렉스라고 생각되면 그 별명을 거부하고 나아가서는 싫다는 의사를 전할 수도 있다. 이때 후자의 경우에 처한 그에게 그들은 ‘쟤는 별거 아닌 것에도 ‘정색’하는 아이’라고 낙인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같은 상황에 받아들이는 정도와 깊이가 다르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가 아닌 그들이 ‘정색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거부감, 불쾌함이라는 ‘감정’을 그의 ‘유별난 성격’으로 치부해서는 안될 일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모습은 얼마든지 있으며, 언제 나타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나는 그런 모습이 없다는 듯 남의 성격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일반화하는 모습을 비추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