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아가씨>_슈테판 츠바이크, 빛소굴
"우리가 벌이려는 이 일은 아마도 의미없는 짓일 거야.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지금처럼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더 의미 없겠지."p.422
주인공은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28살의 여성 공무원으로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처럼 기능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일상은 쳇바퀴처럼 반복되고 언제나 돈에 쪼들려 빈곤하게 살아간다. 이변이 없었다면 30년쯤 똑같은 생활을 반복했을 그녀에게 어느 날 스위스로의 초대장이 날아온다. 이 갑작스러운 스위스로의 열흘간의 휴가는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빼앗긴 본디 그녀의 것이었을 젊음을, 미래를, 희망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향후 그녀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지, 츠바이크의 흥미로운 전개를 따라가 보자.
전쟁으로 인한 빈곤한 일상에서 상류층의 호화로운 삶을 맛보게 되어 젊음과 자유, 사치를 만끽하는 아가씨의 꿈과 같은 휴가는 마치 신데렐라의 동화 속 마법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다른 점이라면 신데렐라에게는 마법과 왕자님이 기다리는 해피엔딩이 있지만 그녀 앞에는 돌아가야 할 진짜 너절한 현실만이 놓여져 있다는 것. 그러므로 독자는 그녀가 최상의 행복을 느낄 때마다 그녀의 최후를 상상하며 불안과 애처로움을 느끼게 된다.
후반부의 그녀의 방황과 고통은 작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이 많이 반영된 듯 보인다. 전쟁이 가져다준 부의 극심한 양극화,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핍박, 그로 인한 조국에 대한 실망과 분노, 희망조차 허락하지 않는 끝 간 데 없는 절망은 2부에 등장하는 페르디난트의 뒤틀린 대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나라는 우리 세대에 끔찍한 죄를 지었어. 그래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국가에 요구할 권리가 있어. 만신창이가 된 우리 세대가 입은 손해에 대한 보상을 받겠다는 것뿐이야. 누가 나에게 훔치는 법을 알려주었지? 누가 나로 하여금 훔치게 했지? 모두 전쟁 때 국가가 나에게 가르쳐 준거야. 전쟁 중에는 '몰수'나 '징발'이라고 표현했지.(...) 국가가 아니면 누가 사기치는 법을 가르쳐주었겠어? 3세대에 걸쳐 모은 재산을 단 2주 만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고, 백 년 동안 소유한 목초지와 집, 밭을 사기쳐서 빼앗아 가는 방법을 누구에게 배웠겠어? 내가 만약 누군가를 죽인다면, 누가 나한테 사람 죽이는 방법을 가르쳤겠어? 연병장에서 여섯 달, 그리고 전선에서 여러 해 동안 배운거지."p.386
출구 없는 우울과 절망 끝에 다다른 그녀와 페르디난트의 선택은 무엇이 될까? 이 작품은 미완의 원고로 추정되나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좋은 엔딩이라고 느낀다. 확실하게 닫혀진 희극이나 비극이 아니기에 그들의 미래를(높은 확률로 비극이겠으나) 독자가 상상해 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전후 사회의 혼란과 극단적인 양극화를 보여주는 통찰력과 개인의 심리변화를 날카롭고 유려하게 그리는 묘사력이 놀랍다. 또한 추후전개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으로 손톱을 깨물며 전전긍긍하며 읽게 만드니, 츠바이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