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환상, 혹은 망상

<성소년>_이희주, 문학동네

by 피킨무무









"나미의 입 안에서 키위의 자잘한 검은 씨들이 오독오독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요셉의 광대뼈 위에 낀 기미와 코에 박힌 피지가 생각나 미희는 속이 울렁거렸다. 미희는 얇은 티셔츠 위로 가슴께를 긁었다. 가려움은 배로, 팔로, 등으로 들불이 옮듯 빠르게 퍼져갔다." p.217


"(...) 부처님이 여인을 불러 물었대요. 너는 어느 정도로 아난다를 사랑하느냐? 그랬더니 여인이 이렇게 말했대요.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합니다.

그 말에 부처님이 다시 물었대요. 어디를 사랑하느냐?

저는 아난존자의 눈도 좋고 코도 좋고 입도 좋고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

부처님아 또다시 물었대요. 눈에는 눈곱이, 콧속에는 콧물이, 입에는 침이 있고, 귀에는 귀지가 끼고 몸에는 피고름이 흐른다. 그런데도 사랑하느냐."p.219


"나는 약한 것이 싫습니다. 따라서 여자와 노동자와 피부가 검은 사람이 싫습니다. 월요일 아침 병원에 줄을 서서 앓은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도시 바깥에 사는 사람이 싫고 노인은 나의 미래를, 어린애는 나의 과거를 보여주기에 싫습니다. 그러나 부잣집의 아름다운 어린애는 다릅니다. 나와는 정반대의 미래가 펼쳐질 어린애를 나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증오할 뿐입니다."p.279



밀레니엄을 앞 둔 해, 한 미소년 아이돌을 사랑한 여자 넷은 납치 계획을 세우고 급기야 실행으로 옮긴다. 넷의 사랑은 각기 이유도 성질도 다른 것이나 공통적으로는 대상을 이상화 혹은 신성시하면서도 동시에 성욕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보통은 여성을 대상화하고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를 씌우는 경우가 많은데 그 반대의 경우라 흥미롭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작품의 마지막이다. 망상과 왜곡의 세계에서 진실을 찾는 것은 덧없고 내 한 몸을 불살라 자신의 팬, 혹은 신도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준 요셉의 긍휼하고도 은혜로운 삶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품의 변방에서 내내 짝을 기다렸던 옥에게로 향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과연 성소년이 아닐 리가.


이희주 작가는 <사랑의 세계>에서도 느꼈지만 추악하고 이상한, 왜곡된 욕망과 사랑을 그리는 데 능한 것 같다.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싶지만 당사자로서는 애절하고 간절하기 그지없다. 어느 두뇌 서바이벌의, 배신과 거짓으로 쌓아 올린 추악한 승리일지라도 박수쳐 주겠다는 모토가 떠오른달까. 관능적이면서 질척이는 생생한 묘사 속에 여성의 욕망만이 질주한다. 작가의 말에 쓰여진 문구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첨부한다. 나 또한 휀걸로서의 과거 혹은 현재를 돌아보건대 휀걸의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보아.


"어느 겨울에 나는 보석새 한 마리를 봐

그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고 싶었다

배를 갈라 검고 윤기가 흐르는 붉은 보석을 바쳤다

가슴을 열어 희고 단단한 새장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불처럼 행복했다


어느 아침 눈을 뜨니

보석새는 녹아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이 웃었다

너는 속았다

처음부터 보석새는 없고

너는 얼음새를 쥔 것이라고 누가 말해

하지만 새장은 여기에 남아 나에게 새의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절인 오이가 여름 햇빛을 기억하듯이

썬 당근이 토끼의 위장을 기억하듯이

빈 새장을 만지며 나는 말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구나


물이 오줌이 되어 질질 샌다는 건 새에게 비밀이다

새가 한 번도 새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건 나에게 비밀이다"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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