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선생님의 유서

<인간 실격>_다자이 오사무

by 피킨무무




서두와 종장에 우연히 수기원고를 얻게 된 '나'라는 화자를 등장시킴으로써 픽션의 형태를 유지하지만 사실 논픽션에 가까운 자기 고백이라는 것을 쉬이 알아차릴 수 있다. 어찌 보면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속 3부에 등장하는 구구절절한 죄의식 고백의 향연인 선생님의 유서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작가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 직전 작품이 바로 이 <인간 실격>이기 때문이다.


나약한 한량 도련님의 우울과 허무를 다룬 이 이야기는 깨나 감성적인 문장들과 폼나는 제목으로 패전 후의 공허함과 혼란한 사회 속 일본 젊은이들의 자기 방어제로 인기가 있었을 법하다. 개인적으로는 자의식과잉의, 하하버스를 떠올리게 하는 요조버스에 갇혀 사는 자기혐오주의자의 자기변명으로만 읽혀진다. 말 그대로 루저의 자기 합리화와 자기 연민에 지나지 않는달까. 엄격한 아버지, 억압된 유년기에 기인한 일탈이라기엔 지나치게 자기 파괴적인 데다 10여 년에 걸친 일탈이라니!


비슷한 맥락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또 다른 유약한 금수저 도련님인 홀든이 떠오르는데, 그가 3일 동안 벌인 뉴욕 일탈기는 <인간 실격>의 요우에 비하면 너무나 귀엽고 내실이 두터운 편. <호밀밭의 파수꾼>이 순수의 세계에서 가식적이고 물질적인 어른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도기를 그린다 치면, <인간 실격>은 과도기 따위가 무어랴, 바로 패망하는 패전기 그 자체다. 패전기에서 공감과 희망을 읽어내는 독자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가 싸워는 보고 패배했는가, 라는 것이다. 가령 원자폭탄 두 방에 무엇도 못해보고 허무하게 패전을 선언한 일본제국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하면 대충 짐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맛없는 음식에 한기와 고통을p.59 느끼고 목화솜에도 상처를 입p.61는 유약한 그는 죽기는 겁나지 않지만, 상처 나고, 피 흘리고, 불구가 되는 것은 질색 p.103 하는데 이런 인물이 생존을 위해 투쟁해 보았을까?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고통을 감내하거나 용기를 내보았을까? 진정 자신의 인생을 살았을까? 투쟁 없이 패배를 선언하고 여성들의 기둥서방으로 지내는 그에게 경제적, 정서적 독립은 요원하다. 그저 술과 약, 섹스에 중독되어 인생을 소모할 뿐이다. 기실 그는 인간의 자격을 상실당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걷어차고 나온 꼴 아닌가.


"잃어버린 걸작. (...) 그 후 이것저것 그려봐도, 내 기억 속에 있는 작품들에는 영 미치지 못해서, 나는 늘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듯한, 애절한 상실감에 괴로워했습니다.

마시다 남은 압생트 한 잔.

나는 그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것 같은 상실감을 이 말로 은근히 표현해 봅니다." p.87


개인적으로 소리 내어 웃었던 문단인데(이 자체가 작가의 "우스운 행동"에 해당되려나.) 심지어 그토록 위대한 걸작, 한 때 가지고 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재능, 그것마저 과연 존재는 했었을까?, 자의식과잉의 발로로 나타난 확증편향된 자아는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든다.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압생트에 비유한 그 자체도 너무나 비대한 자아를 보여주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엔딩에서 보이는 자기변명 역시 일본 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를 성공시킨 위대한 대일본제국이라는 자부심,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아시아 선도국이라는 야망이 허무하게 꺾인 일본제국, 전범국으로서 아시아 전역에 전쟁으로 인한 민폐("부끄러운 생애"p.13)를 끼쳤음에도, 사랑받는 일본인("천사같이 착한 아이"p.137)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할 수 없는 그들의 내재된 심리가 그대로 반영되지 않았는가.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개인사이나 동시에 그 안에서 일본인 전체의 역사를 읽어 낼 수 있다면("세상이란 개인"p.93이며 거꾸로 하면 작가 개인이 일본사회라는 것) 너무 지나친 것일까.


내가 초반 내향인의 마음에 공감하다가도 이건 아닌데 몸부림치며 읽어낸, 이른바 '다자이'세상에서 단 하나 성숙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단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간다,라는 마지막 문장. 다만 왜 주인공 요조와 작가 다자이는 이 진리를 앎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았나 의문이 들뿐이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이른바 '인간'세상에서 단 하나 진리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단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간다."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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