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킨무무 Nov 08. 2023

살아남아 증명하라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 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 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p.208



이 작품은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인물의,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수용소 내에서의 하루를 꼬박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에 들어왔으나 실제로는 권력자의 정권유지를 위한 공작의 희생양이다. (따지고 보면 공작이라는 말도 거창하다, 그들의 목숨은 게임판에 사용될 일이 없는 쓸모없는 패와 같이 하찮다.)  사실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마찬가지로 없는 죄가 만들어져 붙잡혀 온 경우다. 그들은 수용소 내에서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작업배당과 배급되는 음식의 양과 같은 생존을 위한 최소 조건에만 집착할 뿐 그 어떤 신념이나 이상, 인간적 의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간수의 눈치를 보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치사하게라도 살아남아 하루를 더 살아나가는 것, 그것이 수용소 내에서의 지상최대의 과제다.


작가는 외부 사회와 단절된 채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내하며 하루를 또 살아내는 이들의 지극히 사적이고 사소한 일상을 매우 담담하게 풀어낸다. 슈호프는 마지막에 이르러 작품 속 하루를 흡족하고 행복한 날이라고 묘사하는데 이것은 어쩐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_<운수 좋은 날>, 현진건


"이 시간대는 수용소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지금 여기에서도 그 느낌이 전해졌다. 뭔가 섬세하고 고통스럽고 허무한 느낌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향수였다."_<운명>, 임레 케르테스



김첨지의 운수 좋음은 앞으로 있을 그의 비극을 더욱더 강조하고 쾨베시 죄르디가 수용소를 향한 애수를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소년의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그들이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고 말할 때 독자는 반대로 그들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치는 역설적으로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소외된 이들의 비극적인 삶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만들며 나아가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진실을 파악할 수 있게 하고 당대 정치권력자들을 비판하게 만든다. 감정을 배제한 담담한 문체가 오히려 감정을 배가시키는 것인 셈이다.


작품 속 수용소를 국가라는 틀로 치환해서 읽을 수도 있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할 이 국가에는 시스템이 전무하다. 하루하루는 개인의 운빨로 버텨진다. 기준도 법령도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운용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엄과 고고함을 유지하냐, 못하냐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더 상기해야 할 문제는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을 이처럼 생존과 인간성을 위협하는 환경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 소수 권력자들의 정치적 야욕이라는 점이다. 또한 보고도 못 본 척,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지, 하고 눈을 감은 다수의 방관자들의 존재다.


우리는 수용소의 벽 안쪽에서 비참하고 치사하게 생을 살아낼 수도, 벽의 바깥쪽에서 아직 닥치지 않은 불행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도 있고 혹은 뭐가 달라지겠냐며 냉소만을 던지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 누가 그 벽을 쌓아 올렸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억은 역사가 되고 시간은 흘러 슈호프는 삼천육백오십 삼일의 형기를 버텨내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역사 속 진실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었다.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고 닭을 죽여도 새벽은 찾아온다.  그러니,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일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무엇이든 증명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너와 나 사이, 미세하고 미묘한 균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