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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킨무무 Nov 30. 2023

인생의 역사

<세월>_아니 에르노





이제껏 본 적 없는 색다른 글쓰기 방법을 보고 싶은 당신은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다만 반드시 결말을 확인하라. 여러  개의 두서없는 메모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그러나 엔딩까지 나아간다면 이 신기하고도 희한한 글쓰기 방법의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작품은 아주 독특한 서술법을 택하고 있다. 아니 에르노, 그녀는 이 책의 작가이자 화자로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결코 스스로를 '나'라고 칭하지 않고 '그녀' 혹은 '우리' 같은 3인칭 대명사로 지칭한다. 이것은 작가가 기록한 그녀의 인생사가 작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 무수히 담긴 다수의 사람들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은 다수로, 프랑스라는 국가로, 세계로 확장된다. 작가는 자신을 "끊임없는 타인"p.321으로 설정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타임라인에 공동의 시간을 엮어내어 재구성한다. 이 작품에 무수히 등장하는 탄생과 죽음들을 보라. 이것은 개인의 인생이 곧 공동의 역사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녀의 인생을 돌아보는 매개체로 자신이 찍힌 몇 장의 사진들과 동영상이 등장하는데 이는 각기 분절된 단위의 정지된 시간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한 여자의 인생에서 연속적으로 이어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질 것이"p.19나 작품을 통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무언가를 구"p.324해 내면서 "모든 장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p.326이기에 이러한 모순은 성립된다.


또한 에필로그라 할 수 있는 부분에 다다르면 작가의 집필 의도와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작품의 첫 장에서 보여준 것과 비슷한 파편화된 메모조각들로 돌아가며 이야기는 완벽한 순환구조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반드시 결말까지 보아야 완성되는 이야기다.


"해가 다르게, 아니 달이 바뀔 때마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변함없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된다고 확신했었던 사춘기 때와는 반대로, 이제는 그녀가 달리는 세상 속에서 부동의 자세로 있는 듯한 느낌이다."p.312


"어쩌면 언젠가는 사물들과 그것의 명칭이 불일치를 이루고 그녀가 현실을 명명하지 못하게 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만이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지금, 글로서 미래의 자신의 부재를 형태로 만들어 놓아야 하며, 20년째 자신의 분신이자 동시에 앞으로 점점 더 긴 시간을 보내게 될, 아직 미완성인 수천 개의 메모 상태에 불과한 이 책을 시작해야만 한다."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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