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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쟁이 Nov 02. 2020

어딜 가나 한국인은 있다

처음 겪어본 나 홀로 여행의 현자 타임, 그리고 그 와중에 만난 귀인들

 혼자 한 달간 유럽 여행을 간다 하는 순간부터, 기대되는 부분이 컸지만 동시에 걱정되는 부분들도 많았다. 특히, 숙취가 두려워 술을 열심히 조절한 것도 있지만, 정말 안전 상의 이유로 조심한 것도 컸다. 어찌어찌 일주일이 넘도록 별다른 문제없이 여행을 잘하고 있었고, 술에 취한 채 돌아다녀도 별 문제는 없구나 싶었던 어느 날. 이 여행 중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던 순간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특별히 소매치기를 당했거나 (나중에 당하긴 한다), 바가지를 썼다거나, 길을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너무도 맑은 날씨의 스코틀랜드 한복판 광활한 자연경관에서 느꼈던 두려움이었다.


이야... 내가 어쩌자고 여길 대책 없이 왔을까... 처 돌았네 진짜...


맥캘란 증류소를 등지고 찍은 풍경... 정말 허허벌판이다. 아------무것도 없다.

 아마 비행기에서 내린 후 처음으로 제정신이 돌아왔던 순간인것 같다. 때는 에딘버러 관광을 좀 하다가 더프타운으로 넘어온 후였는데, 이 더프타운까지의 길이 차를 타면 서너 시간 정돈데, 기차를 타면 돌고 돌아 7시간이 넘게 걸린다. 내 여행의 목적이 '술'인데, 물론 렌터카는 생각도 안 해봤다. 게다가 엘긴(Elgin) 역에서 맥캘란 증류소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끊겨서, 근처 아무 호텔에 들어가 길을 물으니 불러준 택시를 타고서 겨우 증류소에 도착했다. 이렇게 얼추 8시간이 넘게 걸렸다...

 택시비가 25파운드... 그마저도 잔돈 좀 깎아준 가격이었다. 한 20~30분 조금 안 탄 것 같은데 순식간에 와인 한 병은 사 마실 돈이 증발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해둔 숙소의 위치를 보니, 여기서 걸으면 한 시간이 넘는다. 그리고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그런 거리를 걸어갈 엄두가 안나는 풍경이다. 정작 이 여행을 결정하게 만든 목표지에 도착했는데, 나의 멘탈은 이 여행을 시작하고서 처음으로 박살이 나 있었다. 이 오지에서, 위스키 증류소 투어를 마치고 어떻게 숙소로 돌아가야 할지...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증류소 투어를 시작했다.


 어쨌든 목표했던 맥캘란 증류소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조금 아담한 느낌의 스케일이었지만, 정말 세련된 건축미를 자랑했다. 약간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나오는 호빗들의 집 같기도 하고, 전략적인 벙커같이 생기기도 했다. 내부는 온갖 맥캘란 위스키 시리즈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거대한 증류기들이 스팀펑크 영화의 배경음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젊은 친구가 되게 나이 들어할 법한 취미를 즐기시네... 증류소 가면 어르신들이 많을걸요?

 에딘버러에서 묵었던 한인 민박의 주인아줌마가 내게 했던 말이다. 맥캘란 증류소를 가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이가 좀 있는 부부들이 주된 관광객들인 듯했고, 6월에 개방한 증류소를 7월에 갔으니 여행객이 많을 거라고는 상상도 안 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속한 투어 타임(시간별로 8~10명 정도씩 채워서 진행)에 조금 늦게 한국인 부부가 한 팀 들어왔다. 정말!! 너무!! 반가운데, 부부로 보이는 여행객에 말을 거는 건 학창 시절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필자에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맥캘란 증류소의 투어 프로그램 'The Six Pillars'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맥캘란 위스키의 맛을 구성하는 6가지 기둥, 철학들에 대해 짚어가면서 진행된다. 구체적인 투어 내용과 위스키의 맛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을 통해 풀어볼까 한다. 사실 이 투어에서 기억에 남는 건 그 내용보다도 전시 시설의 구성이었다. 한국에서도 소위 와이너리, 양조장 투어를 가본 적이 있는데, 낙후된 시설이며 부족한 컨텐츠며... 정말 아쉬웠다. 반면 이 증류소 투어는 정말 건축물의 외양만이 아니라 내부도 최신식으로 정비되어 있었다. 하나의 기둥(Pillar)에 도착할 때마다 관람객들은 아래와 같이 휠을 돌리게 되는데, 이때 그 기둥의 주제와 관련된 모형이 작동한다.


왼쪽과 같이 평평한 테이블에서 휠을 돌리면, 오른쪽 사진과 같은 모형이 나온다. 이 모형은 오크통의 종류와 위스키의 색상 관계를 설명해준다. 아 그리고 진짜 말도 안되는 배경은 덤

 이 뿐만이 아니라 온갖 프로젝션과 움직이는 시설물들이 미디어 아트처럼 설치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전공 분야와 관련 있는 것들이다 보니 정말 정신없이 즐겼다. 순식간에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대망의 시음 시간이 왔다. 이때까지도 분명히 들리는 저 한국인들과 말 한마디 못 나눠봤지만... 시음하면서 들어간 술이 조금이나마 말을 틀 수 있었다. 어째 바텐더한테 말 붙이는 건 막 하는데, 같은 한국인 여행객한테 말붙이는게 이리 힘들었을까. 아 물론 내성적인 내가 아니라 그분들이 먼저 말을 걸어주셨는데... 그 첫마디가...


지금... 한국이 이겼대요...

 아 그렇다. 내 투어 타임은 2018년 월드컵 독일 대 한국 경기가 있는 바로 그 시간대였다. 우리 투어가 끝나고 시음 시간이 됐을 땐, 경기가 끝났고 2:0으로 한국이 이긴 상황이었다. 아 이렇게 대화 소재(라고 쓰고 안주라고 읽습니다)가 생기고, 나는 그 두 분이 술을 좋아하시는 신혼부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앞으로 제 로망은 당신들입니다. 심지어 남편 분께서는 렌트카 운전을 해야 하셔서 시음용 위스키들도 못 마시는 상황이셨고, 그 몫을 고스란히 내게 주셨다. 아 진짜 지금 글 쓰는 이 순간에도 너무 고마워요 진짜.


순서대로 언오크드, 12년 트리플 캐스크, 더블우드, 셰리 캐스크, 언에이지드 캐스크 블렌디드다. 개인적으론 셰리 캐스크가...

 위스키를 맛보는 방법, 캐스크의 종류와 스타일에 대한 간단한 설명들과 함께 위스키를 맛보는 시간이 지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 남은 위스키를 마시는 시간이 주어졌다. 위스키를 홀짝이며 한국인 부부분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행선지가 반대방향이심에도 불구하고 혼자 여행 온 나를 어엿비 너기시어 숙소까지 태워다 주시겠다고 선뜻 나서 주셨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더프타운까지 이동했고, 조그마한 보답이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에 런던에서 모은 바 리스트를 공유해드렸다. 차비가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어찌어찌 무사히 맥캘란 증류소를 거쳐 더프타운의 숙소에 도착했다. 참, 술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세상 어딜 가도 있다.

이런 풍경에 술마시면 진짜 안취해요 ^^ 저 잔이 이 잔인데... 짠... 그 때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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