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놀고 자고, 참 좋은 걸? 그러다가 나는 종이 되었다.
인간은 독립하는 것이 건강하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보호'라는 명분 아래, 혹은 '공동체'라는 소속감 아래 스스로의 독립을 유예하곤 한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뼈아픈 자기 고백이자, 맹목적으로 공동체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방치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다.
나의 선택권: 제한된 자유와 보호의 양면성
솔직히 말해 보자. 나의 선택권에 있어서도, 아버지 덕분에 나의 돈과 선택에 대한 책임이 제한되고, 수련회도 갈 수 없고... 이런 완벽주의의 성향 등이 나 안에 강박적으로 있는 것이 너무 내 스스로에게 해롭게 느껴지고, 그래서 독립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재정적 자유가 생기면 되지 않을까'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독립이 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있으니, 여전히 다른 무언가에 종이 되고자 하는 노예의 마인드셋이다.
어쩌면 지금으로서 아버지 덕분에 보호되는 부분도 있겠다. 내가 만일 집과 차가 있었다면, 분명히 죄를 짓는 유혹이 가득했을 것이다. 나의 부족한 상황 속에서 집중하며 준비할 수 있다는 부분은 나에게 한줄기 빛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잠깐 정리하자면]
결국 재정적 독립은 간절하지만, 현재의 통제된 상황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역설적인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나의 자율성'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문제는 이 자율성을 잃게 만드는 것이 단순히 아버지의 통제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 숨어 있다.
공동체라는 이름 뒤에 숨은 개인의 성장 부재
만일 내가 공동체에 속해있고 소속이 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성장을 내려놓는다면 어떨까? 개인이 말할 수 있는 자유 혹은 성장해야 할 책임을 다른 어딘가에 맡겨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이단과 사이비는 위험하다. 무언가를 우상화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가스라이팅 속에 "너는 내가 부를 때 즉각 즉각 불러야 하고 이 판은 나의 권위이니 너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맞다"라고 말을 한다. 도전을 하고 개인이 성장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라는 사고가 가득한 것 같다.
이러한 개인의 책임과 자율에 대한 갈증은 비단 사이비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공동체 생활에서도 이어진다.
사실 나는 현재 기독교 동아리에 있는 게 어떤 부분은 많이 불편하다. 순장이라는 단어를 강박적으로 말하느라, 동등한 관계에 있지 못함과, 내 삶에 나의 통제와 자유가 없으니, 내 몸은 이곳에 이들과 같이 있으나, 나의 지갑은 열리지 않는 상황이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00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부당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무시도, 하나님 뜻
애교도 하나님 뜻이다.
솔직히… 그냥 나에게 맞지가 않다. 나를 자꾸 도전하게 하시지만, 또 책임이 없으면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부분도 진심으로 알겠으나, 그래서 나는 더욱더 앞으로의 나의 삶을 위해 심고 싶다.
젊음의 낭비와 뒤늦은 후회
젊음의 시간에 ‘뭘 할 수 있겠냐’보다도 한심한 말은 없다. 심을 수 있는 시간에 심고 싶다. 심지 않으면 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ㅇㅇ교회에서 대학부에서 열심히 섬겼던 사람이 그러한 말을 했다. "내가 과거에 조금 더 열심히 학구적인 부분에 대해서 내가 준비를 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 교회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보니, 내가 걸어 나오게 되었을 때 내게 남는 것은 없더라."
직업을 챙기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자세이기도 하다, 어떤 시점에 와서는 말이다.
실력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실력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안 한 게 아니라 그냥 정말 게으르다 못해 시간을 허비하고,
한 번도 심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면 어떨까.
신앙적 훈련이 과연 나를 바꾸고 변화시켰던 적이 있는가? 수련회나 경험적 모임을 보았다.
자극적 음악과 경험. 그리고 그것이 나를 변화시킬거라 기대한다.
그 공동체에서 나의 실질적인 실천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자신의 자율적인 삶과 책임을 따르는 삶이 없이 어질러진 질서와 삶. 분산된 생각과 태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분산된 사고로 인해서 사실은 그 분산된 삶으로 인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심고 있고 투자하고 있는 곳이 어디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하시는지에 대해서 모르게 된다.
즉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오늘 내가 심어야 하는, 오늘 내가 심을 수 있는 밭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자, 내가 큰 갈증을 느끼게 되는 부분도 그러하다. 자신의 소유와 밭이 없기에 줄 것도 없는 삶.
공동체의 비전이 있지만, "내 개인이 준비해야 할 하나님의 때를 위해서는 토양을 일구는 부분이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드릴 때 나는 사람들, 혹은 다른 이들이 어떻게 그냥 그 시간을 흘려보내듯이 나의 욕구를 취하며 바라볼 수 있는지 생각이 든다. 나는 결코 그 어느 것도 나의 기쁨, 심지어 축구 경기마저 나의 기쁨으로 둘 수 없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누군가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동일시 여기지 않는가?)
[핵심은 이것이다]
개인의 밭을 일구지 않고 공동체에만 기대는 것은 위험하다. 공동체가 개인의 성장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공동체는 목표를 위한 도구일 뿐, 개인의 자율적인 신앙 훈련을 대체할 수 없다. 또 그것은 다른 사람이 심은 것에 대한 전적인 무시이기 때문에, 나도 나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나도 게으르게 아무것도 심지 않아도 나중에 뭐라도 변화가 일어나겠지'라고 내 삶까지 대하게 된다.
책임과 통제가 사라진 삶의 비참함
나는 그런 사역자를 보았다. 자신이 사역자라는 타이틀로 2-3개의 한국의 사역 팀을 한다. (내가 말하는 사역자는 미안하지만, 정말 나와 다를 것 없는 크리스천 동년배기 사람이다. 만일 ‘찬양 사역자는 다르게 살아야지!!’라고 이런 정죄와 판단을 하면서, 자신이 만일 그 찬양 사역자보다 거룩한 삶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면, 당신은 한국 찬양 사역자 혹은 목회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전혀 없다. 당신은 왜 크리스천이라고 자칭하면서 찬양 사역자보다 거룩하게 살아내지 못하는가?)
어쨌든 찬양 사역자는 실력을 기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흐르는 대로 소위 말하기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신뢰하며 살아간다'라고 말을 하였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찬양 사역자와 사람들의 경향은 인스타 릴스로 고딩이 트워킹하는 영상을 주기적으로 매일마다 섭취를 했다. 자신의 삶이 개혁되지 않고, 그저 공동체에 딸려 끌려가듯 간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책임을 지기 위해 삶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 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학원의 전제 또한 학생의 취업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손해 혹은 가스라이팅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강한 압박이다.
하지만 회사생활의 불필요한 사교 등과 같이, '이렇게 해야 좋은 공동체 생활이다' 등과 같은 것을 강조하면서, 점차 가면 갈수록 "어차피 너는 여기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냐, 그러니 너는 이곳에 있는 것이 너의 최선이다" 등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나의 삶은 훼손된다.
스스로 공부하고 심는 생활에 대해서 무시하고, "너가 혼자서 심어봤자 뭐하냐 같이 시간을 보내고, 최대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와 같은 말을 하게 된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공동체는 좋지 않다. 공동체란 내가 각자 심어서 자라게 된 결실을 가져와 서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내가 말한 것이 노는 것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했다면 결국 남는 것은 없이 공동체 조직 안에서 그러한 것은 되풀이 될 것이다. 결코 놀며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름답지도 못한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감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는 그러한 삶을 살면서, 나중에 가서는 나라 탓, 세금 탓을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의 이득을 탐하고 훔치는 자들이다, 게으른 자들은 .
만일 무인도에서 그렇게 일을 안했다면 두들겨 맞을 짓이다.
일하지 않는 것은 그냥 비합리적이다 못해 누군가에게 짐을 지우는 명백한 행동이다. 나도 한때는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안다.
스스로 밥을 떠먹지 않는 자들에게
신학을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되어 목사가 되는 것인가? 아니다. 신학을 했지만, 교회를 세우는 재정부담 등으로 인해서 그냥 자신의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내가 챙기고 투자하지 않고 심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나의 밥을 떠맥여주기 위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사람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라가는 경향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청년들이 헤벌죽 그냥 냅죽 냅죽 어른들의 사랑과 재정을 받아먹을 생각을 하다가, 결국 자신도 돈을 쓰고 싶으니까 최소한의 것으로 일을 한다. 꿈도 없고 나라를 위한 나라도 없다. 그냥 나 혼자라도 먹여살기 위한 극단적 이기주의로 간다. 세금도 안내려고 한다.
내가 만약 교회, 특히 대형교회는 돈도 많으니 내가 그냥 술에 취해서 대문 앞에 누워있으면 알아서 밥 맥여주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태도는 없다. 그러고 나서 ‘교회는 사랑이라며, 왜 나를 안 먹여주냐!’라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있다면, 이것 하나는 인정해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똥 싸는 갓난아기에 불과하다는 것. 갓난아기는 평생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 그게 좋은가? 그러면 그렇게 살아라.
아니 그렇게 살아도 사실 누군가 먹여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스스로의 태도를 살아가기로 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만일 한 국가가 자신의 국방비를 0원으로 만들었다고 치자. 그리고 다른 나라에게 구걸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국가가 침략을 당해 누군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충분히 발전할수 있는데 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유가 아닌 몰락으로 맺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많이 본다.
기술 발전으로 인한 전쟁도 일어날 것이다. 과연 한국에 있는 공동체원들이 그러한 것에 대한 생각과 사고를 통해 발전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세상의 원칙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지 질문해본다.
사람은 원래 어리석은 행동을 자신이 하고 신을 원망한다.
심지 않은 것을 기대하지 마라
그러니 때와 시기에 맞게 내가 마땅히 준비할 것을 위해서 시간을 쓰고 낭비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만일 자신의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위해 개혁될 수 있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면서 공동체라는 우상화에서 '따라가주겠지'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한 생각은 없다. 공동체가 무너지거나 흔들리면 내가 끝장이다. 공산주의라는 말이 있다. 노력하고 자신의 자본을 위해서 자신이 투자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그냥 좋다 좋다 하면서 서로 물고 빠는 곳이었다.
함께하는 것, 또 함께 무언가를 숭배하며 희희덕대며 같이 몸을 섞는 것 자체를 '사랑'이라고 표현을 한다. 단체로 나쁜 짓(도박, 마약)을 하는 사람들도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들과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차이는 바로 진정으로 멀리 가기 위해서 중요한 일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부인이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자신이 어울리고 싶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의 개인의 삶이 개혁되고, 누군가를 위해서 책임질 수 있는 자기 단련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비참하다. 외부적 요인의 인정 혹은 승패에 따라서 업과 다운이 결정이 된다. 마치 이제 들어왔으니 '어 도전 과제 깸 ㅇㅇ' 이렇게 되고, 또 삶에서 방향은 없으니 뭐 공부는 적당히 하다가 혼자서 신앙 생활하기는 상당히 어려우니까 얼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만나는 것을 갈망만 계속하고, 돈을 쓸 수는 있고 서로 물고 빠는 과정이 ‘좋은 것’으로 치부하지만...
집에 가는 이들의 손에는 소망과 복음이 아닌, 핸드폰과 릴스로 가득하고, 그들은 밤늦게까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음란물을 보고 잠에 들고 과제는 늦게 제출되고, 학교에 와서는 또 사는데 힘들고 스트레스 받고... 시간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고, 쇼핑도 하고 그러다 말씀을 읽으며 회개도 하고, 개인의 삶과 책임을 잊어버리고.
이때 공동체가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 ‘어~ 너 개인 없지 ㅅㄱ요. 이름 개명해라. 너는 우리 공동체야. 우리가 니 머리야.’ (보통 사람을 위해서 그런 식으로 전제를 한다.) ‘넌 생각을 비워.’라고 하는 순간 좆된다. 개인의 삶과 선택에 대한 책임이 삭제된다. 순삭된다. 그냥 없다. 그러면 나는 누구이지? 내 시간의 값은 뭐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 하나 없고, 삶의 절제는 사라진다.
군대, 이등병으로 군대에 들어가는게 엿같은 이유는 이와 같다. 선임이 누굴지는 모르겠지만, 이딴 사고 방식으로 후임을 가지고 놀려는 선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을 잘 그을줄 알아야 한다. 부당한 사람은 그냥 그 사람의 역할만 인정하라. 친구가 될 필요가 없다. 웃어주고 연락을 절대 먼저 하지 마라.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도움이 되길 원하고 그게 나를 지키는 수단이다. 그리고 그 선임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자신도 그렇지 않을까 돌아보라. 교만하지 마라.
반복된 체험이 나를 만든다
주체성을 잃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체험하는 것 - 반복적 체험 - 반복적으로 스스로에게 어떠한 체험을 하게 만들었는지가 곧 나를 이룬다. 내가 오늘 심게 된 결과(성과)는 내일 오게 되고, 내가 하게 된 삶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신실하게 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삶은 more more 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적합하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더하는 것을 통해 나의 의를 증명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집어치우기를 바란다. 당신이 월에 몇 원을 벌던지 간에 그것은 나의 목표가 아니다. 나의 목표는 바로 평범한 하루들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결과와 목표를 위해서 영혼을 팔지 말자. 그딴 지나가는 것에 당신의 영혼을 팔아, 최고의 결과물을 얻어야 존중을 받는다는 거짓말에 속는다면, 세상은 당신을 잠깐 인정해줄 것이다. 아주 잠깐. 그리고 사람들은 쉽게 당신의 특별함에 질리며 다른 곳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당신의 존엄성은 실력에서 오지 않는다. 실력은 내 삶의 일부에 불과하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한 명 한 명 소중한 한 아이이다. 자신을 보살피기로 하자. 그리고 삶의 개혁이라는 방대해 보이는 것은, 그저 당신이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위해서 시간과 기회를 조정하는 소중한 기회에 불과한 것이다.
모두가 말하는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진정한 효율은 바로 꾸준함과 성실함에 있다. 왜냐하면 결과는 삶의 산물이자 맺어지는 열매의 흔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Let us not become weary in doing good, for at the proper time we will reap a harvest if we do not give up
고린도후서 9장 6절: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Remember this: Whoever sows sparingly will also reap sparingly, and whoever sows generously will also reap generously.)
그런즉 도전하고 싶다. 교회 혹은 누군가가 나를 떠맥여줘서, 내가 심지 않은 것이 알아서 자라겠지라고 기대하고 있는 이들이여. 공동체는 전부가 아니고, 공동체는 너의 개인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공동체의 리더가 바라야 하는 것은 바로 개인의 삶이 성장하여 성숙한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공동체의 전제는 개인의 삶이 전제된다. 개인의 성장을 다른 공동체에 맡긴다는 의미는 다른 의미에서는 심는 시간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하고, 솔직히 자신의 개인의 시간은 릴스와 유튜브로 가득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 속 내가 심지 않은 것이 알아서 싹 피고 나오겠지라고 생각을 하며, 잡초 밭에서 쌀 한 톨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해라. 길바닥에 있는 거지와 같은 마인드셋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발 시험 끝났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갓생'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 그만둬라. 인류를 위해서 내가 오늘 심을 것이 있는데 왜 도피하는가?
나는 사실 시도를 많이 한 만큼 실패도 직접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글이라는 것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왜 실패했는지를 알고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난다고 할지라도 뜨거운 마음이 맺게 되는 이슬비와 같은 삶은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글을 쓴 이유 중에 하나는 반응이었다. 짠맛을 잃지 않기 위한 일종의 grasp 붙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