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폐막식과 개막식. (21번째 이일)

by 김로기

김장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다음 한 해를 준비하는 거라고 했다.

엄마는 김장을 끝내고 나면 늘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올해 할 일 끝냈다."

매년 숙제처럼 여겨졌나 보다.

요즘처럼 먹을 게 넘쳐나는 시대에도

김장은 집집마다 인륜지대사처럼 남아있는 듯하다.

결혼 후에도 김장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하물며 시아버님은 배추를 손수 키우시기까지 하신다.

우리의 결혼에 맞춰 귀농을 하신 후로는

작으나 크나 늘 아버님의 손을 거친 배추들이 모습을 보인다.

첫해에는 씨알이 작다며 근심이 가득하셨지만

그래도 나름 속이 알찬 게 맛있었다.

매년 배추의 크기와 모양이 달랐지만

아버님이 손수 일궈내신 배추였기에 조금 더 귀했다.

매년 11월 중순이 되면

시댁 식구들은 모두 시골 아버님댁에 함께 모여 김장을 한다.

시골이라 그런지 주변에 몇몇 분들이 손을 보태기도 하신다.

나 같은 엉성한 손이야 도움이 될 리 만무하지만

야무진 여러 개 손들이 모이니

반나절이면 김장은 마무리된다.

김장은 절이는 것이 반이라고 하던데

우리가 도착하기 전

아버님이 미리 절여 두시는 배추 덕분이다.

집집마다 가져온 김치통을 가득 채우고 나면

서둘러 점심 준비를 시작한다.

오전에 김치를 버무릴 때

따로 빼둔 적당한 크기에 노란 배추들과

먹을 만큼 덜어낸 김치 속을 밥상에 올린다.

김장하는 날은 늘 비슷하지만 만족스러운 밥상이다.

다 같이 모여 앉아 올해도 고생 많았다는 덕담을 주고받는다.

요즘은 김장을 하지 않는 집도 많다고 하고

나 조차도 김장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저 아직은 우리 식구들의 다수가 김장을 원하고

그것을 따르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른들은 김장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신 듯하다.

그저 음식을 만드는 행위가 아닌

한 해를 마무리 짓고, 또 준비하는 가족 행사정도로 느끼시는 것 같다.

마치 한해의 폐막식과 개막식 같은.

날이 갈수록 이런 가족행사들은 줄어들고

모두가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귀찮고 번거로운 일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때가 되면 또 지금의 이런 귀찮은 일이 그립기도 할 것 같다.

언젠가 우리 집에서 김장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오겠지만

그전까지는 매년 엉성한 손이라도 보태고 있을 것 같다.

여전히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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