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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편합니다. (5번째 이일)

by 김로기

꽤 오래전부터 눈이 나빠서 흐릿하게 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래도 예전엔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뚜렷하게 보려고 했는데

요즘은 굳이 애쓰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을 자세히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을 나도 모르게

반쯤 감은 눈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오해를 살까 걱정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일들을 제외하면 굳이 힘을 들이지 않고 산다.

다들 불편함이 없냐고 물어오지만

물론 불편하다.

그래도 그냥 괜찮다고 말한다.

아주 예전 추운 겨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타야 할 버스는 1번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버스가 몇 정거장 전에 있는지 표시하던

알림도 없을 때였고

그냥 예정된 배차 시간표에 맞춰 버스가 오면 타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1번 버스가 정류장에 섰고

나는 앞사람들을 따라 천천히 버스로 향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타려던 1번 버스는 늘 사람이 많았는데

웬일인지 그날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재빠르게 주변을 살피다 보니

버스 옆면에 크게 11번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행히 버스에는 타지 않았지만 하마터면 퇴근 시간에 크게 돌아갈 뻔했었다.

그때의 일을 들은 친구들은 크게 걱정하며

안경에서부터 라식수술까지 권유하고 나섰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지금도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안 탔으면 됐지. 이런 일이 얼마나 있겠어." 하고는

그냥 넘겨 버렸다.

렇게 살다보니 눈이 나빠 멀리 있는 것들이 흐릿하게 보인다는 게 좋은점도 있었다.

피부가 좋아 보인 다는 것.

거울 가까이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적당한 거리에서 나의 잡티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또 길거리에 더러운 것들이나

특히 동물의 사체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다고 해도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덜 기억에 남는다.

그래도 뭔가 있어서 피해 갈 정도는 보이니까.

단점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핑계가 된다고들 하겠지만

그 말들이 나에게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는다.

오히려 뚜렷하게 보기 위해 감당해야 할 것들이 더 큰 것 같다.

그렇게 살다 보니 눈이 나빠도 굳이 안경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애써 남들처럼 정확하고 뚜렷한 눈으로 모든 것을 보지 않아서 편해진 일들이 생겼고 대체로 만족스럽다.

그래서 괜찮다.

흐릿하게 보는 것이 많은 부분에 있어 불편한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뚜렷하게 볼 때보다 그렇지 않은 순간 마음이 편해질 때도 있기에

나는 오늘도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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