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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죽이지 못했다.

키우는 일만큼 죽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85번째 삼일)

by 김로기

얼마 전 '올해도 상추를 심었다.'라는 글을 게시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도 알 수 있듯

나는 매년 상추를 심고, 그 상추는 매년 죽었다.

올해는 기필코

손바닥만한 상추를 수확하겠다는 사명을 띠고

열심히 알비료와 물 주기를 반복했다.

사이사이로 새살이 돋아나는 상추는

계속해서 새잎을 드러냈고

올해는 드디어 나의 상추가 빛을 발하는가 보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북이 자란 상추들을 조금 다듬을 겸

상추를 한 겹 한 겹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 제길."

나는 그 말을 내뱉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망할, 진드기.'

딱 봐도 진드기가 내 상추들을 온통 휘감고 있었다.

손을 대기도 징그러울 만큼

제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잎사귀마다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었다.

급히 인터넷에 진드기 박멸법을 검색했는데

물에 주방세제를 조금 타서 뿌리면 진드기 정도는 쉽게 없어진다고 했다.

바로 주방으로 달려가 분무기에 세제를 조금 타서 상추에 골고루 뿌렸다.

아니, 상추가 아니라 진드기를 향해 매섭게 뿌려댔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상추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어깨를 살포시 들었다 힘 없이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드기들은 활발히 제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식물용 가위를 들고 상추의 잎사귀를 통째로 잘라버렸다.

마치 대역죄인의 상투를 잘라내듯

단호하게.

그리고 다시는 상추를 키우지 말아야겠다는 결심까지.

이제 상추 따위 신경 끄고

진드기에 오염된 저 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나 고민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상추를 확인하러 갔을 때는

지난번과 다른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뜨고 상추를 들여다봤다.

"웬걸, 다시 자랐잖아."

그랬다.

죽여야겠다고 잔인하게 잘라냈지만

상추에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다시 진드기로 뒤덮이면 어쩌지.

그 진드기가 다른 식물들에까지 번지면 어쩌지 하며.

흙을 완전히 갈아엎어야 하나 싶은 그런 고민.

결국 고민 끝에 나는 한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리도 끈질기게 새잎을 밀어낸 노고를

무시하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며칠 뒤면 나의 선택의 결과가

또 나를 혼란스럽게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한번 빛을 보기 시작한 것들은

키우기도 쉽지 않지만

죽이는 일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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