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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꽃 구독을 취소했다.

로망이란 지금의 삶보다 한 단계 위에. (89번째 일일)

by 김로기

이사 오고 얼마 뒤부터 일평생 꿈꿔오던 로망을 실현해 보기로 했었다.

바로 생화 가꾸기.

햇빛에 사방으로 반사되며

반짝이는 유리병 속에 한두 송이 꽃을 꽂아두는 일.

내가 생각했던 아름다운 집에 늘 있던 것.

그것을 내 집에도 두고 싶었다.

요즘은 '꽃 구독'이라고 해서

원하는 주기에 한 번씩 집 앞으로 꽃을 배송해 온다.

화분도 아니고 꽃다발 속에나 꽂여있을 법한

잘 다듬어진 꽃들은

매주 다른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곤 했다.

겨울이면 핫팩과 함께.

여름이면 아이스팩과 함께.

시들지 않기 위해 애를 쓴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꽃들이 들었을까 기대하며

집 앞으로 배송된 택배 박스를 들고 들어오곤 했었다.

어느 날에는 그다지 싱싱하지 않은 상태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꽃이었다.

시든 꽃이라고 할지언정 나를 설레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줄기를 다듬어 꽃병에 꽂아 두고 나면

내가 무엇을 하든 나의 시선을 빼앗곤 했다.

그러다 살짝 질리거나 시들어 갈 무렵이면

또 다음 꽃이 배송되었다.

꽃 구독에 대한 만족도는 꽤나 높았다.

그렇게 얼마 뒤.

나는 그렇게도 좋아하던 꽃구독을 취소했다.

언제나 나를 설레이게 해 주었지만

어쨌든 꽃은 사치스러운 소모품이 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가장 먼저 끊게 된 것이 바로 꽃 구독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일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뭐라도 줄여 나가야 했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삭제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나의 꽃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언제는 있었던가 싶을 만큼 화사한 꽃들은 없지만

다양한 초록의 빛을 내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여전히 내게는 탁자 위에 놓인 꽃이 로망이지만

로망이라는 것은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무언가이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보다는

한 단계 위에 존재함이 분명하다.

삶에 무엇인가를 더했을 때 그 삶이 풍요롭고 사랑스러워지기도 한다.

비록 지금의 삶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이상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그 로망을 다시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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