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들> 제47장 중에서...
고독 없이, 시간의 시련 없이, 침묵에 대한 열정 없이, 온몸으로 흥분과 자제를 느껴본 적 없이, 두려움에 떨며 비틀거려본 적 없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무엇 안에서 방황해본 적 없이, 동물성에 대한 기억 없이, 우울함 없이, 우울해서 외톨이가 된 느낌 없이 기쁨이란 없다. <떠도는 그림자들> P181
에밀리는 가족 전체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었다. 언제나 창백하고 과묵했으며, 눈 색깔은 진회색 혹은 어두운 청색이었다. 그녀를 묘사하기란 쉽지 않은데, 정력적이고, 응축되고, 거침없고, 야성적이고, 소심하고, 단호하며, 열광적이고, 우울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피아노를 칠 때를 제외하고) 편이었다. 에밀리와 앤은 말없이 늘 붙어 다니는 쌍둥이 자매 같았다. 몸과 그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에밀리는 늪가, 올챙이, 개구리, 물 냄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개 키퍼를 몹시 사랑해서 자주 그 개를 데리고 산보를 다녔다.
호어스에 장난감 병정들이 담긴 박스가 도착한 1824년, 그 해 여름 내내 병정들은 젊은 남자들이 되었고, 에밀리는 '심각한 눈빛의 쾌활한 남자'처럼 보이는 나무 병정 하나를 골라 자신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우리 네 사람-남자 형제 패트릭 브랜월을 포함한- 모두가 그 병정을 그레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우리들 중에서 에밀리야말로 심각한 여자였다. 좀체로 말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퍽이나 정이 많았다. 나는 어느 점으로 보나 내 동생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애는 남자보다 강하고 어린애보다 단순한 보기 드문 본성을 지녔다. 더욱이 음악에서 보여준 재능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뛰어난 연주 솜씨를 지닌 것도, 위대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 터치, 스타일, 표현이 대단히 강렬했다. 그것은 혼신을 기울여 연주에 열중하는 거장의 터치, 스타일, 표현이었다.
에밀리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잘 견뎌냈지만, 갖가지 병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자신의 책이 출간되고 1년쯤 지나자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자 죽은 다음에 남게 될 자신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그런 다음 서둘러 우리들 곁을 떠났다. 에밀리는 거실의 긴 소파에서 죽었다.
<떠도는 그림자들> 제47장 에밀리...
샘 가까이... 가장 내면에 근접할 때 모든 것은 길이다.
은자는 사막으로, 물고기는 물로, 독자는 책으로, 어둠은 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