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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Dec 14. 2015

떠도는 그림자들 - 마지막 왕국1

파스칼 키냐르

만일 인간의 삶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진짜 현실은 다른 곳,
다가갈 수 없는 비인간적이거나 초인간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라면?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들>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힌트라고 여긴 것은 순전히 나의 놀이에 불과하다. 키냐르는 이 세상이 한 편의 우화이며 우리의 이성은 사라졌다고 믿게 하는 주문을 건다. 그는 연주자가 되어 <마지막 왕국> 이란 제목의 샤콘-16세기 에스파냐에서 생겨난 느린 템포의 4분의 3 박자의 무곡-을 연주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 곡의 주선율만을 따서 곡집에 수록하며 또 누군가 같은 시기에 자신의 어떤 것을 확장시켜 위대한 부활을 출현시킨다.

키냐르는 역사라고 부르는 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기가 그들과 동일한 점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그러그러하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들이 '그랬다'로 얘기한다. '그들이 곧 나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모든 장이 그렇게 쉬어가듯 이어진다. 옛날과 죽음 사이에 있다. 그는 처음의 연주자가 아니며 그저 주선율만을 그저 확장만을 담당했을 그 누군가 중에 하나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키냐르 언제나 마음속에서 고통스러운 감정이 복받쳐 온다. 불현듯 목이 메어온다. 일종의 소리 없는 흐느낌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의 글 속엔 이런 것이 끝 모르게 이어진다. 이미 떠나고 없는 머무르는 다른 왕국,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다른 세계, 신비하고 절대적인 것을 찾는다. 그는 평생 책들이 끌어당기는 힘에 놓여 있기를 바란다. 고서古書가 키냐르인지 키냐르가 고서古書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무아지경에서-언어와 문명의 흔적마저 없는- 가장 먼 옛날을 향해 영원히 열려 있는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자리한 과거 지향적 편집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과거의 냄새와 옛날의 반짝임, 싫증 나기는커녕 이 세상 어디서나 나를 사로잡는 이런 것들에 대한 취향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가장 먼 옛날로 통하는 문의 빗장이 풀렸기 때문에? 순수 인식을 위해서? 시간과 동시에 언어를 알게 되고, 상실하는 것의 의미를 망각하는 이 관심사에 몰두했기 때문에? p197-198

떠도는 그림자들_원제 (Les) Ombres errantes



출생 이전의, 이 세상 이전의, 말 못하는 존재 이전의 한 삶, 한 세상, 계속해서 생기는 시간에 이 모두는 언어가 없다. 모든 장면의 기원, 비가시적 세계, 언어 없이 연출되는 장면, 끊임없이 활동 중인 우리의 관심사다. 불쑥 나타나는 세상, 솟아나는 것들이다. 키냐르가 말하는 것들이 조금씩 새겨진다.

키냐르는 두 근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했다.

(1)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 우리가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 우리를 만들던 사람들, 우리를 만들던 무엇, 우리는 어둠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쾌락을 누렸다. 우리는 아직 쾌락의 그림자들이다. 우리의 근원이다.

(2) 그릴 수 있는 것을 보이지 않는 세계에 옮기는 것이다. 언어로 말해버리면 우리는 잃어버린다. 작가는 자신들 내부의 진짜 화자가 누구인지를 안다. 진짜 화자는 표현 방식이다. 힘겹고, 생각으로 하고, 몸을 굽히고, 언어 자체는 사용하지 않고, 언어로 하는 작업이다. 언어는 역사는 세계는 파괴를 향해 몸을 숙인다.
내가 이 이상한 왕국을 떠올리는 이유는 <마지막 왕국>의 책들, 황야들, 하얀 파도들, 노란 금작화들, 낭떠러지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해초 쪼가리, 조가비 조각, 균열이 생긴 작은 배들, 모래톱의 물결 흔적, 볼 수 없는 장면의 단편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p210


# 그림자의 기록
우리를 만들던 무엇은 사라지게 될 유년기만을 몽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잃어버린 것이 사라진 곳, 사라진 것이 지배하는 왕국, 바로 거기에 마지막 왕국이 있다. 이것과 마찬가지인 인간의 시간은 흔적들을 사라지게 하고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키냐르, 루아르 강의 출렁이는 파도에서 그림자의 일부를 찾았다. 그림자를 상상했고 그림자는 자신을 맞아준다...

아무도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지 못한다.
아무도 자신의 근원을 뛰어넘지 못한다.
아무도 제 어머니의 음문을 뛰어넘지 못한다.

절대로 나오지 말아야 하는 곳에서 우리는 나왔다.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림자들 어디 있는가?'
어둠이 그립다.


# 고서
고서를 읽는 키냐르는 책 속에서 어둠을 그리워한 대목을 찾아 읽는다. 그는 고서에서 발견했다. 사라진 것, 유령의 냄새, 죽음의 향기, 불그레한 가을의 찌꺼기, 부유하는 광막함, 최초의 관계, 희미한 빛, 과거의 흔적을 그리워했다. 오래된 보물들이 사라졌다. 멸종되고 길들여지고 더 이상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되었다. 실종 그 자체다. 아름다움, 자유, 사상, 인간의 문자언어, 음악, 고독, 두 번째 왕국, 연기된 쾌락, 짧은 이야기, 사랑에 빠진 여인의 징표, 관조, 통찰력 이런 것들은 모퉁이에 불과하다.

여기는 동질적으로 문명화되고 집단적으로 변한 가족 내부의 삶이다. 민주주의 체제의 상호 교환 가능한 균일한 존재들이다. 돈, 대중, 대중의 분주함이다. 여기와 대등하지 않은 한 세계가 있다. 연령, 성이 다르고, 역할이 동등하지 않으며, 문명이 섞일 수 없는, 무지한 사람과 학식 있는 사람이 대등하지 않고 말과 글이 다르고, 대중과 개별자가 미개인과 문명인이 동일한 목소리를 지니지 않은 한 세계가 있다.

키냐르 꿈이었을까? 312년-인류, 서양 역사상 처음이었던-처럼 2000년 자발적으로 이미지를 버리고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 전부를 문자들에 바쳤다. 즉 문학에 받쳤다. 고 믿으며 읽었다. (문학에의 열정이 우리들 사이에서 사라졌으며 대중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우리 시대에 화 있으라... 책의 지면에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할 사람이 더 이상 없는 이 세상에 화 있으라... p192-193)

이 세상의 모퉁이에서-구석에서-살아가기
물고기들이 또 수면 위로 올라온다.
죽지 않으려고 들이마시는 공기 한 모금, 그 한 모금이 독서이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 요구되는 고독의 세계, 침묵의 세계, 빛의 세계이다.

옛날은 비시간적인 무엇, 시작하는 '만물-보다-앞선-것'으로서 끝이 없는 것이다. (옛날, 최초의 왕국)
이 세상의 모퉁이에서-구석에서-살 아기기 (두 번째 왕국 = 과거 = 마지막 왕국의 거주민 = 또 하나의 왕국)
노인-어린애의 왕국, 사라진 것이 지배하는 왕국, 바로 거기 (마지막 왕국)


# 시간
불시에 우리를 덮치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익히 알던 무엇이다. 영혼들도 이동한다. 그것은 흐름이다. 흐름에 실려가는 것은 솟구치기 직전의 원천(사라진 것)이다. 이미지와 무無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시간의 조상은 죽도록 추는 최초의 춤이라는 두 가지 시간 속에 숨어서 살았다. 인간은 먹이의 삶이다. 오로라가 하루에 속하는 것은 봄이 한 해에 속하는 것, 즉 아기가 죽음에 속하는 것과도 같다. 영원한 불사의 왕은 죽음이다.

모든 게 예속성과 수면이다. 개인은 수면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같은 것, 파도와 물 분리되지 못하며 자신을  집어삼키는 응집력 있는 물 속으로 신속히 추락한다. 불가항력인 움직임 속으로 늘 추락한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또다시, 그리고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흐름이라는 단어가 강물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얼었던 물은 녹으면서 얼음이 차지했던 절벽 안쪽의 자리를 동굴에게 곰에게 독수리에게 인간에게 내어준다.

시력이 회복된 자, 다시 듣게 된 자, 유배지 벗어난 자, 그들은 돌아오고, 도착하고, 바라본다, 왕국을 알아보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은 자신의 당대를 떠나 시간 속에 도달한다. 멀어지는 자, 멀어진 자,  덧없는 자, 그는 분리된 자이다. 사라진 자는 다른 곳을 규정한다. 키냐를 그렇게 암흑 속에서 읽고 쓰며 머리가 이상해 졌다. 죽어가는 신들의 원망소리인 환청이 들린다.(그렇게 그려졌다)

그 세계가 나타났던 어딘가는 어디였는가?
그 세계가 사라졌던 어딘가는 어디였는가?

가장 오래된 것들이 가장 새로운 것이었다.
세상의 종말, 최후의 것들이 최초의 것들이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모든 생명체가
바로 자신의 유일한 조상을 바라보는 일이다.(지구 핵-세포핵-태양 핵)


# 인류
'언제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모든 날들을 다룰 작정이기 때문이라 한다. 매일 사회적 동물을 매료시키는 죽음을 앞지를 필요가 있다 한다. 우리는 마지막 멸종의 동시대인들이다. 한 번의 눈길을 주는 것을 마지막 작별로 삼고, 손가락 사이마다  첫새벽의 어둠을 지니고 있기를 바라며, 키냐르는 인류의 공식 계약을 무효화시키고 견제하고 평형을 이루고 싶어 한다. 빈 공간, 작은 공백, 보조 선율, 시간에 구멍을 뚫는다.

시장에 가서 누가 죽음을 사려할까? 인간사회는 위험과 죽음을 쫓아다닌다. 전 세계가 죽음의 시장이 되었다. 지구 전체가 자신과의 경쟁관계에 돌입했다. 깨끗함과 더러움이 언제 분리되었는지 모른다. 모순된 개념 책의 지면과 은행 지폐는 손으로 움켜 잡는 기쁨이 있다. 유일하고 동일한 분리다. 키냐르는 배가 침몰할 때는 짐을 바다로 던져버려야 한다고 했다. 신앙의 자유는 메이플라워 호로 운반된 짐이 아니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침몰하는 배처럼 짐(자유)이 던져지고 있다.

희미해지고 바랠 것이고 뒤틀리다 갈라져 너덜너덜해진 사진처럼, 자유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 예속 상태가 주업무가 된 사람들, 공동체들(집단)이다. 고립된 개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혼자인 사람 불행할지어다. 외톨이는 죽은 사람이다. 부족 간 계보상 보존의 목적만 있을 뿐이다. 맞는 말일까? 틀린 말이다. 늘 사회가 늘 신화가 한 말이다. 행복을 맛본 금지된 연인들이 있었고 은둔자, 방랑자, 주변인, 샤먼, 분리주의자, 포르로 아얄의 은자들처럼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혼자인 사람들이 있었다.

# 예술과 신화
예술은 가장 오래된 실천 중 하나다. 문화 내부에 남아 있는 자연이고 그것은 출생이고 우리의 근원이다. 이미지는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보다 먼저이다. 언어  이전부터 있었다. 영혼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숭고하다고 말한다. 으렁거리는 태양, 폭발하는 화산, 모방이 자연 안에서 떠돌고 있고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라 한다.

인간에게는 시간의 이행-과거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이 이루어지기 위해 과거가 필요하다. 새벽빛, 박해자, 영웅이 필요하다. 하나의 답을 튀어나오게 하는 그것은 신화다. 이름 없는 사람에게는 이름이 필요한 법이다. 생기를 불어넣고 회복시켜준다. 모두가 자물쇠에 맞는 열쇠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쏟아지고 뒤얽힌 밤은 하늘의 수레 신화가 필요하다.

소설가들 어떤 진실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드라마 뒤편에서 진짜로 제기된 적은 없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정신을 암흑 속에 밀어 넣고 절망적 탐색을 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번역하려 하지만 우리의 삶 이전에 나온 선행된 답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모욕감을 느낀다. 선행된 답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바로 그곳에는 오직 태어나는 유폐류의 울음소리, 보이지 않는 장면, 목적이 결여된 육체의 탐색, 성姓의 우연성만이 있다.

물아래로 떨어지는 돌멩이 하나가 사라진다.
물에서 동심원들이 퍼진다.
원들이 사라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그 자리에 또 하나의 돌멩이가 떨어지고 있다.

모든 작품은 물속에서 납작해지는 바위의 한 면에 비유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그랬듯이 되풀이되는 미래에서 사라진다.


# 영혼
키냐르 진흙을 찾고 있다. 최후의 영혼은 손에 자신의 책을 소중하게 쥔 채 포도 위로 내려와 진흙탕 속을 후들거리며 걷는다. 키냐르는 사실적 기록으로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한다. 뒤돌아보고 발견한 것을 말한다. 하나의 시선, 하나의 화면, 하나의 반영을 찾는다. 모든 것들의 여왕인 언어, 모든 것들의 여왕인 이미지만 있다.

대체로 하루에 죽 한 사발, 담장 한 모퉁이, 약간의 빛, 책 한 권이면 족합니다.
제 55장 소 피우스의 최후 p217


<마무리>
키냐르의 책을 읽으면 꼭 완성된 퍼즐을 조각내는 기분이다. 한 줄을 읽고 한 줄이 사라지는 글이다. 그가 만든 공백은 시간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 심연이다. 남겨두고 싶은 한 글자 또는 한 줄을 엮어 한 문장이 한 문단이 되도록 기록했다. 그의 말처럼 이 글 위 어디에도 내 생각 따윈 세울 수 없었다. 그저 이 책을  들여다본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그가 내 두 눈을 떠올리며 써줬다고 생각하면 고맙다. 그 혼자 머물다 가고 말 그런 생을 살다가 말 그런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슬픈데 슬퍼하지 말아야지 싶다.

이 책의 마지막 제55장 소 피우스-로마인들의 마지막 왕의 비서관-의 최후는 키냐르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소 피우스 두루마리 형태인 네 종류의 책들을 지니고 떠났다. 그것은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카루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알부키우스 실루스의 소설집,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타키투스의 <연대기>였다. 꼭 키냐르 자신이 저 책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책을 쓴 듯 싶었다. 수수께끼같이 남아 있는 것들은 다시 들춰보지 못할 것만 같다...

<떠도는 그림자들> <은밀한 생> 두 권의 책을 번갈아 읽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들어버려서 다시 책을 펼치기 어려웠지만 그런 시간이 또 잘 지나간 것 같다. 다음은 <은밀한 생>이다. 마지막 왕국의 8~9권에 해당한다는 작가 말이 아찔하면서도 재밌었다. 그는 책의 전체를 이미 머릿속에 그려두고 순서에 따라 (이미 쓴 것도 순서에 이미 포함했다) 순순히 써내고 출간하는 듯하다... 다음이 번역되기까지 아주 오래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사이가 나와 키냐르의 공백일 듯 싶다. 다행이다..



<함께보면 좋은 책>

마지막 왕국 2 : 옛날에 대하여 https://brunch.co.kr/@roh222/36

마지막 왕국 3 : 심연들https://brunch.co.kr/@roh2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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