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훌리아 Apr 08. 2016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시인 주영헌



바람이 지나는 모든 길이 시詩다. 혈관 깊숙한 곳에서부터 외계까지 이어지는 끝 모를 길을 헤매다 방향 잃어버리고 흩어진다.  흘러가다 보면 바람이 다 빠져나가 짙은 해무海霧도 없다. 흐르는 것의 속성은 흐르고 흘러 다시 저곳....


지독한 상실감, 가라앉아버린 희망, 아이를 잃은 슬픔, 진지한 고민, 내 것이 아닌 마음으로 잊어준다는 체념만 남아있다. 텅 비어버린 몸통, 깊은 구멍은 흔들리는 하나의 음표다. 싱싱한 슬픈 잎은 가장 먼 곳에서 말라간다. 고요를 품은 사람의 집은 작은 바람에도 구겨진다....


나무에 위胃가 있다면
胃를 가득 채우는 흔들림은 허공의 속성일 것
부유의 존재들로부터 수유하는 수천 장의 바람
뭉쳐진 그늘 밑에서 나는 나무의 연금술을 생각한다.

<위胃> p24-25






<시를 읽고서>

주영헌 시인은 등단하고 7년 만에 첫 시집을 내었다. 시집의 시작은 해무/윤회/송곳/화병花病/벚꽃족적/외계/졸음,하엽,음표/위胃/호수빌라.... 로 이어진다. 해무를 읽고 덮었다. 윤회, 송곳을 읽고 덮었다. 호수빌라까지 읽는데 보름이 넘게 걸렸다. 다시 읽고 뒤로 후진해서 읽기를 3번 쯤하고 송곳이란 시가 너무도 슬펐다. 

상실감이 이토록 크다면 나는 모르고 싶다. 몰랐으면 싶다. 이토록 슬프다면 누구도 이처럼 슬프도록 두고 싶지 않을듯하다. 하루하루 좋고 싫은 것 투성이다. 고집도 부리고 웃고 화해하기도 하는데 더 이상 없다는 건 설명할 수 없다. 



추운 봄을 불러놓고 저 가시들 웅웅거리며 박혀 있다
눈감은 피안들이 말라가는 공원
누군가 울먹이며 앉아 있다면
그는 지금 목에 가시가 박혀 있다는 뜻이다.

<공원을 지나는> p54








송곳 


빈 몸에 취기로 둥지를 튼 새벽
몸 안이 절절 끓고 있다
거미처럼 천정으로 기어 올라간 그림자가 투명한 집을 짓는
새벽이 터져 환한 아침
순서를 앞지른 아이가 내 옆에서 거꾸로 자고 있다
추위를 쫓고 덮어준 이불 사이로 손가락이 뾰족하다
검게 때가 낀 손톱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겪어 나가는 모든 일은 다 깰 때가 있다
어느 지점을 봉합한 아이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일
잠시 시들었던 아이의 몸에선
시든 꽃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말들이 의사의 입에서 옮겨지고 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놀다 온 두 손
억세게 철봉을 잡았던 손가락도 기진한 듯
아비의 손가락 마디 하나를 잡지 못하고 있다


병실이 놀이터라도 되는 듯
손톱 사이엔 놀이의 흔적이 얼룩져 있다
수액이 줄어드는 시간
그만큼 비워진 아이의 시간이 몸속에 차오르고 있다


분주함이 침대 하나씩 차지하고 누워 있는 병실
침묵은 분주함의 후생 중 하나일 것,


눈을 떴으나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지난밤 가시지 않은 취기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쿡쿡 찌르고 있다
이제 아이는 지나온 빈 시간을 구겨 논다


정지된 것들을 터트리는 송곳이 반짝 빛났다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주영헌, 2016시인동네[출처] 






삶과 죽음의 그늘이 함께 자란다. 노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다.계절이 끝났다. 사랑이 끝날 시간. 하얗게 피어서 하얗게 말라가는 생....




구겨진 기억은 거칠하기만 하다
바람, 하고 부를 때
흩어진 떨림들 사이마다 푸른 피가 흐를 것이고
쓸쓸함이 빽빽이 우거지겠지

<바람을 구기다> p80


* 주영헌 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yhjoo1


이미 진 것을 기억하고
앞으로 질 것을 추억하기 위하여
사람을 쓰다.

2016. 03. 주 영 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