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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pr 12. 2016

에밀리 브론테... 곧 그녀가 <폭풍의 언덕>

사람들이 한 여자에게서 기대하는 모든 것에 역행하는 여자
악의 불가사의에 대담하게도 의문을 던진 아주 젊은 여자
그녀의 이름은 에밀리 브론테.



전작주의를 좋아한다.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을 이어서 읽었다. 그들이 품은 세계를 알고 싶었다. 내가 문학의 세계를 알고 있다면 그 시작은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이다. 독서가 흐지부지 될 시점에서 이것이 말 그대로 운명이라면 그 작가를 통해서 나는 새롭게 독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을 수차례 느껴보고 있다. 시작은 그들이었지만 문학의 전부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주었다.


프랑 콩쿠르 9번째 여성 수상작가 리디 살베르는 열다섯 살에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을 읽고 마음이 빼앗겼다고 한다. 나는 20대에 읽지 못했고 30대가 되어서 겨우 완독 했다. 그 시절에 막장이었을지 모르나 닳고 닳은 나로서는 막장 수준에도 못 들 만큼 지지부진하다 못해 루주 loose 했다. 리디 살베르 <일곱 명의 여자> 산문집에 첫 번째로 소개되는 작가, 그것도 무지개의 빨간색을 나타내는 작가로 에밀리 브론테를 선택했다. 나는 다시 한번 브론테를 알아보고 싶다.








# 에밀리 브론테 Emily Jane Bronte(1818~1848)


모두의 내면에는 근본적인 폭력성이, 파괴하고 파멸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존재한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는 야성적이고, 거만하고, 형이상학적이고, 비사교적이고, 냉혹하게 완고했다. 어떻게 보면 나도 매료되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품는 그의 열정은 절대적이었다. 그런 사랑이라면 찬양하고픈 생각마저도 들었다. 반면에 캐서린의 행동은 못내 답답했었다.


캐서린이 아마도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리디 살베르는 말하는 듯하다. 풋내 나고 밋밋한 채 안락한 집안에서 기껏해야 수습사원이나 되길 바라는 어린아이의 모습 말이다. 열다섯 살에 읽고 가슴에 불을 냈을지 모를 이 작품을 읽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무 늦게서야 만난 탓일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다. 에밀리 브론테도 우리와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 그녀도 요크셔 지방의 외진 마을 하워스에 틀어박혀 지냈다. 지금 깔리고 깔린 로맨스 장르소설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없음을 나도 인정하고야 만다.







영국 요크셔 주 손턴에서 출생한 에밀리 브론테

바람이 단련된 황야, 워스 계곡을 굽어보는 언덕 꼭대기, 자갈길 가운데 가르는 풀 우거진 언덕 풍광이 끝없이 펼쳐진다.


언덕 위에는 드문드문 초라한 농가 몇 채와 움직이는 양떼들이 매달리듯 서있고, 계곡 깊이 자리한 세계의 방적공장에 나오는 연기가 우중충한 하늘을 한층 어둡게 만들고 있다.


강한 서풍이 휘었고, 겨울엔 눈 때문에 밖을 나갈 수 없었다. 가을이면 짙은 안개로 비현실적인 황야가 되었다.


고리타분한 신앙, 설교자의 무서운 목소리, 방적공장의 고달픈 노동조건뿐인 곳이었다.


에밀리 브론테는 이곳에서 견디기 힘들어한다. 난폭한 인간관계, 지위 막론하고 남녀, 어른과 아이, 인간과 짐승 마저도 폭력적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결핵으로 차례로 세상을 등진 형제들. 그녀에게 종말론적 풍경이 지배적이었다. 그녀 내부의 은밀한 상처,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넘쳤지만 스스로 한탄하는 것을 금했다. 죽음 앞에서도 복종하지 않으려는 단호한 결의가 있었다. 아파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린아이 같이 놀면서 무시당하는 것을 싫어했다. 부당한 말엔 냉정하게 돌아섰다.


리디 살베르 작가는 사실들을 종합하여 자신이 본 듯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유년기를 살피고 성격을 분석하여 준다. 엄격한 이모에게 순종해야 했던 그녀는 대응책으로 산책 취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소령 같은 에밀리는 동물들 위에 군림하기도 했고 그들과 말을 거는가 하면 애지중지하거나 혹독하게 나무라고 용서를 빌었다. 어느 날 사나운 개에게 물렸고 부지깽이를 불속에 넣었다가 이를 악물고 환부에 대었던 그녀다. 그녀의 소설 모든 것은 이 행동 안에 있다.


형제들끼리 모여 나무 병정 놀이는 소설 세계의 첫 토대를 구축하고 전설이 되었다. 지역의 모든 인물들은 살아있는 자신의 문학세계 안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연명하고 있다. 그녀는 기숙사 생활 유지할 수 없었다. 하워스가 자신의 모든 자유였다. 사내 같은 태도, 명민한 지성, 환상적인 상상력, 음악적 재능은 그녀를 더욱 야생적이고 독창적인 하워스 안에서 살게 했다. 사회의 논리를 맹렬히 거부했다. 스스로의 절대 주인이 되었다.


그녀에겐 오직 한 가지 욕망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황야로 하루빨리 돌아오는 것.
서풍이, 건강한 바람이, 울부짖는 바람이,
곧 그녀가 <폭풍의 언덕>


-19세기 여성문학은 없다.-
문학은 여자의 일이 될 수 없으며,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자가 자신에게 부과되는 의무에 헌신하자면 재능을 발휘한다거나 여흥 삼아서라도 문학활동을 할 여유를 갖기는 힘들 것입니다.


작가들 모두 문학적 영광을 꿈꾼다. 에밀리의 언니 샬럿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시절 여성들에게 부과된 운명은 그렇지 못했다. 세 자매 샬럿, 에밀리, 앤은 1846년 5월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이라는 남자 가명으로 시집을 출간한다. 그리고 이후 그녀들은 소설에 몰두한다. 샬럿 <교수>, 앤은 <애그니스 그레이>,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 출간한다.


알다시피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 혹평을 당한채 죽음을 맞는다. 나도 리디 살베르가 느끼는 것처럼 히스클리프가 에밀리 자신이라고 믿었다. 전혀 그녀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소설 안에서 나는 그녀를 느꼈던 것 같다.


난 에밀리를 어떻게 상상했던가?를 떠올렸다.
그녀가 그 당시에 히스클리프라는 남자를
상상만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 훌리아 -


# 소설의 규칙, 삶의 규칙


소설 속에서 히스클리프는 업둥이, 야생의 아이, 이름도 혈통도 없는 아이, 검은 천사다. 번듯한 가문의 캐시와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푹 빠진다. 그 매혹은 오래가지 못한다. 모든 것 시들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에밀리의 계획은 매혹이 영원히 머물게 하고 미래는 빛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악을 알기 위해 끝까지 가야만 했다.


1846년 에밀리는 엘리스 벨이라는 가명으로 <폭풍의 언덕>을 출간한다. 샬럿은 이미 <제인 에어>로 히트를 쳤다! 비평가들의 에밀리의 인물들이 상스럽고 자유분방하며 도덕이 결여되었다고 평한다. 모든 점에서  예술에 역행하는, 옹호할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위협적이고 교양 없는 소설이라고 가리킨다. 죽어서도 혹평은 이어졌다.


1877년 앨저너 스윈번이 <폭풍의 언덕>의 매혹적인 페이지들에 열광하면서 일부 여론이 바뀌었고 확실히 종지부를 찍은 건 버지니아 울프의 찬사를 통해서였다. 울프는 '거대한 무질서로 분열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세상을 한 권의 책 안에 결합시킬 힘을 자기 내면에서 느낀 여성의 거대한 야심'을 찬양했다.


형제였던 브렌웰의 건강악화, 자신에게 없는 천재성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는 점점 타락의 길을 걸었다.  죽음앞에 놓였다.. 에밀리는 브렌웰을 돌보다 자신도 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쇠약해져 갔지만 절대 나약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용기까지 지켜냈다. 1848년 12월 9일 그녀의 생명이 꺼졌다.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랑이야기라고 우리가 찬양했음을... 그녀는 끝내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죽던 날, 마지막 세월을 함께했던 거대한 불도그 키퍼가 그녀의 침실 문 앞에 엎드려 있었다. 녀석은 울면서 나흘 동안 그곳을 지켰다.



리디 살베르 산문집 <일곱 명의 여자>의 첫 번째 편 에밀리 브로테 편을 읽으면서 작가와 함께 그 책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에밀리 브론테에 대해 리뷰했던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아래 링크) 그리고 나머지 6명의 작가는 나도 작품을 읽고서 리디 살베르와 다시 만나 이야기 나누면 좋을 듯했다. 문학 선생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이 때론 어느 교수의 말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밀란 쿤데라가 그랬고, 로맹 가리가 그랬고, 파스칼 키냐르가 나에겐 그랬다.






1) 리디 살베르 산문집 <일곱 명의 여자>

https://brunch.co.kr/@roh222/193



2) 파스칼 키냐르가 본 에밀리 브로테

https://brunch.co.kr/@roh222/130



3)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

https://brunch.co.kr/@roh22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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