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잃은 고아같은 남자....
여자의 빛
Clair de femme : roman
그는 사랑할 줄 알되 행복할 줄 몰랐던 사람이다.
여성성이라는 모국을 잃은 사내가 거울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남자, 타자, 나, 무국적자.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모국을 앗아갔군. 친구. 당신의 샘, 당신의 하늘, 당신의 밭, 당신의 과수원을. 그 나라에서 그녀의 금발은 유년의 은신처들보다 더 안전하고 은밀한 곳이었다. 그녀의 금발이 내 두 눈을 가려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동안 나는 순간순간을 누렸다. 궁극적인 지각, 존재 이유라고 해야 할 그런 순간들을. 그 존재 이유가 그녀 아닌 모든 것으로 확장되었다. 마침내 가시를 벼리고 돌을 담금질하는 데 어떤 결핍감, 어떤 박탈감이 필요한지 알게 된 것처럼.(P38-39)
우리는 인간의 기억보다 더 오래된 존재들이었다. 태고의 맛을 지니지 않은 행복은 없다. 빵, 소금, 포도주, 물, 신선함과 불 둘이 함께 있으면 서로가 땅이고 서로가 태양이다. '우리가 서로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P39)
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내 가슴속 내레이터의 충실한 중얼거림을. 추억을 잃어버린 이들은 더 이상 오래된 프롬프터 소리를 듣지 못한다. 당신이 왜 거기 있느냐고,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어째서 세상은 거기 없느냐고 당신에게 묻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 마치 당신이 우주의 불심검문은 발화자가 없는 질문이라고 주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지상의 육체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숨을 가르고 떼어내고 벌리고 들어 올리고 둘로 나누어야 했다. 그것은 언제나 그만큼 손실이다. 마음은 하나인데 몸이 둘이라면 언젠가는 반쪽이 되어야 한다..(P43)
'내가 당신의 조용한 시간을 방해한 거야? 지독한 방해지. 당신이 여기 없으니 말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을 떠났다.(P43)
그녀가 누워 있소. 이미 몹시 고통을 받고 있소. 나는 그녀 위로 몸을 기울이고 있소. '내가 있잖아'하며 상대를 안심시키는 남자다운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말이오. 미칠 것 같았소.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내 볼을 만졌소. '당신이 나를 어찌나 사랑해주었는지 이건 거의 내 작품 같아. 마치 내가 내 삶으로 정말 뭔가를 만들어낸 것 같아. 수백만의 사람이 언제나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지만, 성공을 거두는 건 오직 하나의 커플뿐이야. 수백만 중에서 둘도 성공하기 어렵다니까.'(P.114)
나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살면서 당신에게 내 추억을 줄 거야. 조국을, 땅을, 샘을, 정원과 집을, 요컨대 여자의 빛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엉덩이의 흔들림, 머리카락의 흩날림, 우리가 함께 만들 주름들. 그러면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겠지. 나는 여성적인 나라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보초를 설 때가 아니라면 혼자가 되지 않겠어.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내게 살아야 할 이유를 줘. 흠 없는 것, 행복한 것, 불멸하는 것......
여자의 빛을.(P115)
나는 그녀의 입술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내 손가락들이 줄곧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이어 내 손은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세월로부터 보다 밝은 것을 취해 하얗게 센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나아가 그녀의 주름 속으로 들어갔다. 미소가 만드는 주름, 날개 사이에 자리 잡은 십자가 같은 이마의 세로 주름, 부드럽고 섬세하게 파인 눈가의 주름 속으로. 세월이 해놓은 일. 삶은 자신이 해놓은 작업으로 명성을 누릴 만하다. "그러니까 당신이 거기 있군. 여자의 빛이 있어. 다른 남자들은 그것 없이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P126)
지금 내게 남은 당신의 일부를 사랑하는 데에는 숲, 들판, 바다, 대륙, 세계를 보는 것으로 충분해. 그 무엇이 너무 빨리 지나갔어. 아주 멀리 날아갔어. 당신 기억나? 발데모사에서 본 두 개의 올리브나무가 어찌나 친친 얽혀 있던지 어느 게 어느 건지 구별할 수 없었잖아. 그런 우리를 도끼질로 갈라놨어.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아파. 특히 두 팔과 가슴이.(P142)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여자의 빛을 갖지 못한 허깨비 같은 내 모습이 외지인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지붕들 위로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주위의 사물들이 나를 자기들 흐름으로 다시 끌어들이려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원과 우주와 광년이 벌이는 작업이 거기 있었다. 하늘은 짐짓 표정을 꾸며댔지만 그 광대함은 그의 뜻을 배반했다. 진짜 하늘은 손으로 가릴 수 있을 만큼 작으므로.(P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