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훌리아 Oct 25. 2018

지금 우리는 슬프도록 유명한 가이스트 숲에 있다

로맹가리 <징기스콘의 춤>


의식이란 인간을 전제한다.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유난히 경계심이 든다.
신이라면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한계를 안다, 그리 대단치 안다는 것을.
하지만 인간에겐 한계가 없다.
그들은 무슨 짓도 할 수 있다.



<징기스 콘의 춤>은 로맹 가리의 더없이 적나라하고 겸허한? 표현으로 쓴 소설이다. 오직 그만이 볼 수있는 '그것'을 가리키며 말한다.  희생자는 있으나 가해자 없는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당신에겐 어떤 증거도 없소!' 명백한 동기 없이 집단 사망자가 발생할 땐 배후에 어떤 교설이나 이데올로기... 어쩌면 국가적 동기 같은 것이 있는 법이다...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부헨발트, 오라두르에서 벌어진 일의 책임을 누구에게 지울 수 있나? 하나님은 필요없다. 이 지상엔 아직 인간들이 있다. 자신들이 가진 수단을 알고 사태를 장악할 수 있는, 의지에 찬 단호한 진짜 인간들.... 매일같이 누군가가 와서 새로운 쓰레기를 쏟아붓는다. 신나치들과 그들 언론이거나, 아니면 온갖 종류의 역사적 잔해들, 핏자국이며 뭔지 모를 더러운 얼룩이 진, 지난 세기의 악취나는 고물들, 역겨운 이념적 사상들...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학살자와 희생자는 어쩔 수 없이
서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단 말인가?



부헨발트 / 아우슈비츠 / 오라두르
트레블링카




내게 유대 귀신이 붙어 있어.
한밤중에 날 깨워
자기들 장속곡을 부르게 하지.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일날-



지금의 독일은 유대인들에게 점거되었다. 현존하지 않지만 그들의 존재를 느낀다. 거리마다 그 자리에 없는 유대인들이 가득하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붙잡는다. 1966년 베를린에는 데이비드 바이츠라는 랍비가 한 명 있다. 그는 "유대교 회당을 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 베를린 사람들이 그를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렸다"는 것을 영국잡지 선데이 타임지에 털어놓았다.

웃음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갖게 될 때까지 죽은 600만 유대인은 독일을 떠날 수가 없다.  그들의 의무라도 된것처럼 남겨져 있다. 그 시대의 독일인들은 그저 복종했고, 명령을 수행했을 뿐인데 이 양심의 가책이 너무도 큰 것임을 안다. 전범들은 재취업을 했다. 유대귀신 콘의 유일무이한 최후의 관객 샤츠는 그의 신성한 존재다. 유대귀신이자 희극배우인 징기스콘은 샤츠헨서장과 22년째 함께 있다. (샤츠는 모든 것을 비극으로 받아들인다)




최후의 심판? 아니..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고
그래서 '인간'이 창조되었지.

독일에서 나치즘이 부활하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
'인간'은 다른 걸 찾아낼거야.

(여러분의 사회가 무사하길 바란다)
"마즐토브~!"
-행운을 빈다라는 뜻-




샤츠의 관할구역내 가이스트(독일어로 영혼이란 뜻) 숲과 주변지역에서 여드레 만에 스물 두명이나 살해되었다. 연쇄살인의 공통점이라면 죽은 자들은 예외없이 모두 남자들이었다. 모두가 마치 황홀경 상태에서 살해당한 것 같았다. 모든 악의 순간들, 진짜 범죄의 물결은 온 세상이 알고 있다.  고통을 자본으로 이윤을 남기는 방식(황홀경에 빠뜨린 것은 죽음, 어떤 다른 죽음, 기원이 다른 죽음, 새로운 죽음, 우리에게 어울리는 죽음발명, 어떤 문화적 죽음, 교양있는 죽음, 예술적 죽음, 절대의 맛 죽음!) 이런 미스테리를 이해하고자 애쓴다.




가이스트 숲은 온통 환한 빛을 발하며 계시받은 시체들로 뒤덮인 전쟁터로 탈바꿈하고 있다.

아마 (그녀는) 어느날, 이 가이스트 숲 어느 구석진 곳에서 갈가리 찢지게 될 것이다.



로맹 가리




(로맹 가리)
문화에 도취하다가 우리의 중대 범죄들이 흐려질까 두렵다.
이것이 영감의 원천 소재에 지나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의 탐욕이 돈벌이 정신에 지나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의 불행에서 이득을 취할까봐 두렵다.
모두를 돕지 않고 몽상에 빠져 있을까 두렵다.



오직 자신들의 짧은 트랙 일주만 생각하는 서정적 어릿광대들이지.
우리 걸작들이 일단 박물관 밖을 나서면, 우리가 그것들을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회수하게 될지는 신만이 안다.





폴 고갱의 '설교 후의 환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그린 고갱의 상징주의 작품 / 그림의 해석, 천사와 야곱의 싸움은 진짜 세계가 아니라 생각, 감정, 상상을 담아 보아야 한다.

주변을 둘러싼 사제와 수녀들은 자신이 씨름하는 문제를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두손모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후기 인상파의 개척자 고갱이 1888년에 그린 이 작품은 고갱의 예술관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조롱당하고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습관이 밴 사람이다.
나는 실망시킬까 봐 두렵다. 막중한 책임감이 나를 짓누른다.
이스라엘 전체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존엄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다.



유대인이 파뭍힌 구덩이를 순례하다 뛰어든다. '더는 그 무엇도 슬프지 않다'  그 자리에 드러누워 두 눈을 감는다. 이렇게 해서 누구에게, 무엇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을까?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 (피에 젖은 역사, 고장난 죽음) 고통받는 자 나인지 다른 누구인지, 혼란스러운 모호한 꿈이 있을 뿐....너무도 많은 밤....죽음을 불구로 만드는 꿈을 꾸는가...




독일인의 잠재의식도 결국 탈유대화할 것이다.
사람들이 전처럼 계속 그러지 않을 거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더는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이디시어(유대인이 사용했던 서게르만어군 언어)에...'이해하는 건 용서하는 거다'라는 말이 있다.



모든 걸레와 수건이 뒤섞여 결국 아름다운 드레스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상과 갈망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감수할 수 있다. 우리는 절대에 대한, 완전한 소유에 대한 취미를 가질 수 있다. 도달하는 일없이 낙담하더라도.... 자연이 다시 희망을 갖고, 다시 고개를 쳐들고, 분명하게 숨을 쉬기 시작한다. 자연은 희망으로 산다. 언젠가는 거기(인간이 없는)에 되돌아가고자 한다.

아무도 인류를 꿈꾸지 않는다면 인류는 영원히 창조되지 않을 것이다.




* 마무리
샤츠가 유대인 작가 로맹가리의 잠재의식 속에 떨어졌다. 디부크란, 자신을 사로잡고, 자신 내부에 정착하여 주인 행세를 하려드는 귀신, 사악한 악령이다. 자신의 저주받은 문학으로 미래 세대의 정신세계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진짜 죄인 샤츠라는 나치디부크를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서 짓밟고 있다. 콘은 공모자일뿐... 샤츠를 유대인의 잠재의식 속에 절대 해방되지 못하도록 만들려한다. 한편 이 모든 관계는 크로스적이다. 로맹 가리 스스로 나치탈을 벗어던진다.

로맹 가리는 두려우나 두렵지 않다. 펜 아래 사라지게 될 운명이라도, 평생을 그런 질식 속에 시달리며 살아왔고, 아직 최악의 순간이 아니었다고 믿으며, 두려움을 달랬던 로맹 가리였을까? 어디까지나 짐작의 짐작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헤치지 않길 바랄뿐.... 보탬이라면 더없이 기겁게 받아들이려 한다. 내가 느끼는 로맹가리는 언듯언듯 자신의 상태를 고백한다. 그가 두려워했던것들 못내 떨쳐지지 않는다.

원치않는 것은 유대 표현주의니, 유대 예술이니 그런 것이다. 로맹가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 연민에 무감각한 냉소주의, 집단 이기주의다. "당신은 아무 느낌도 없소?" 그는 만회를 시도하기도 하고, 정신적 혼란을 통제할 줄 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증명하려고도 한다. 독일인의 의식 속에서 미친사람처럼 춤을 춘다. 그런 춤, 그는 자신과 친한 이들이 그런 춤을 추길 바라지 않는다. 최고의 걸작을 위해 20세기 마지막 딱 한 명(유대인)만 취했다는 사실 속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을 뿐...

내 마음속에서 (그들을) 끌고와 잡아 죽이곤 한다. 그게 역사적 인물들일 수도 있고, 아직도 진행중이기도 하고, 이제는 체념한채 끝이 보이지 않아 더이상 끌고와 잡아 죽이진 않게 되었다. 누가 대신 용서하는 게 마땅찮다. 그래서 모든 게 용서가 되지 않고 제자리 걸음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해하므로서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 너무나도 어렵다...

더이상 꿈꾸기를 단념한다면.... 시작도 끝도 없는,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냉소주의, 인간 주위를 배회하는 영원의 미소.... 릴리(릴리트 : 사탄의 동반자로 여겨지는 여성 악마)의 미소... 낙원(인간이 없는)의 미소... 다시 한번 더 희망을 품고서... 어느것도 쉽사리 갖을 수 없는.... 평행선만 같다....해결책이란... 인공심장같은 것이 아니라... 책에서 그 해결책이라것을 발견하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지만....  슬프도록 유명한 가이스트 숲에 떨어진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책 곳곳에 느껴지는 아무르.... 슬픈 사랑이다.




아마 (그녀는) 어느날, 이 가이스트 숲 어느 구석진 곳에서 갈가리 찢지게 될 것이다.

어떤 환상 , 자유 의지, 자유롭게 동의한 제물. 언제나 내가 (그녀를) 몹시 사랑하며 언제나 (그녀를)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진실이다.

이런 나의 사랑은 파괴가 불가능할 뿐아니라 접촉하는 모든 것을 위대하게 만든다.

- 로맹 가리 -



p.s 프랑스 사이트 '바벨리오'에 실린 <징기스 콘의 춤> 독자들의 서평란 : 별점 3개 "1966년 진 세버그와 함께 바르샤바로 간 로맹 가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미친 소설이 탄생했는가? 소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절로 그런 의문이 떠오른다. 물론 그의 신랄한 유머, 기민한 문체, 정곡을 찌르는 놀라운 문학적 표현 감각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다.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뒤흔들고, 충격을 주려 한것 같다."

사실 이 작품은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 <솔로몬왕의 고뇌> 만큼 맨정신으로 읽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사선으로 읽고 마구잡이로 넘기기도 했다. 몰라도 되고 알아채면 다행이고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런데도 문득 슬퍼지려고 하니.. 역시나 로맹가리구나 여겼고, 여하튼 내가 로맹 가리이기 때문에 인내심을 발휘한거라 생각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