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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ug 09. 2017

로제 그르니에 <책의 맛>

문학의 세계

로제 그르니에는 알베르 카뮈(당시 <콩바>편집장, 사장은 파스칼 피아)의 추천으로 레지스탕스 신문 <콩바>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20년 넘게 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작가 생활을 시작하고 40여편의 작품을 출간했고, 1985년 그의 전 작품에 대해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대상이 수여되는 영애를 안았다.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고 문학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로제 그르니에는 프랑스 문단의 살아 있는 역사다.


<책의 맛>은 로제 그르니에가 바라보는 문학의 세계다. 그의 글과 소설 속의 글, 작가의 글들이 어우러져 있다. 기사소설을 지나치게 많이 읽은 돈키호테처럼, 그도 머릿속 장치가 고장 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어머니가 늘 걱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제 글쓰기가 자신에게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고 한다. 파스칼 피아는 비록 침묵을 택하고 글쓰기를 거부했지만, 그래도 그에게 문학은 그를 삶과 묶어주는 것이었다고 로제는 떠올린다.




이 모든 책들... 나에게는 독서야말로
기다림과 분리될 수 없는 으뜸 행위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눈은 글자를 따라 나아가고,
정신은 더 멀리에서 일어날 일을 알고 싶어 안달하며
눈이 나아가길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려야만 한다.

- 로제 그르니에 <책의 맛> 중에서 -




인들의 나라


범죄는 행위의 이행이다. 그러나 신문이나 라디오 혹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지는 범죄 뉴스는 행위를 이야기로, 언어로 전환한다. 사회 뉴스를 소비하는 대중에겐 시작과 중간과 결말을 갖춘 이야기가 필요하다. 사회 뉴스 이야기는 어디서 시작될까?


아무 말 또는 아무 달 또는 아무 해에 어떤 잡지를 뒤적이더라도, 거기서 성실과 선의와 자비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허풍과 진보와 문명에 대한 더없이 뻔뻔한 주장, 그리고 동시에 더없이 불쾌한 인간의 도착 성향을 페이지마다 발견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신문은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잔악한 이야기로만 짜여 있다.

개화된 인간은 매일 아침 식사 때마다 그 혐오스러운 식전주를 곁들인다. 신문, 담벼락, 인간의 얼굴 등, 이 세상 모든 것이 범죄를 발산한다. 순수한 사람이 혐오로 몸을 떨지 않고 신문에 손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벌거벗은 내 마음> <보들레르 전집>1권 중에서-



신문기사, 사회뉴스에 대한 진술은 문학처럼 이루어진다. 작가는 잘 완결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한다. 저널리즘은 정의와 대다수의 인간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들은 인간이 논리적이기를, 그리고 죄를 짓더라도 논리적 행동만 하기를 바란다. 그 행위는 종이와 잉크의 형태로, 경찰서들을 전전하는 임무를 맡은 무명 리포터의 초보적 기술을 통해서 승화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상상력이 부족한 존재가 범한 행위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회뉴스 전체가 그야말로 시인들의 나라.






다림과 영혼


순수한 상태의 기다림,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이다.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 우리가 실존에서 지우는 무엇이다. 기다림의 시간을 중하는 것을 거부할 때 우리에게 닥치는 결과는 죽음의 문턱이다. 아이는 자기 삶을 빨리 흐르게 하고, 빨리 늙어버린다. "아이야 기다림이 더 이상 없을 때야말로 불행하단다..."



매우 긴 기다림의 시간,
우리가 살아볼 만하다고 여기지 않는,
나중에 다시 시작하거나 다시 살게 될 진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괄호 속에 집어넣는 삶의 전형적인 파편 가운데 하나

- 삼 년째 제대를 기다리는 군인 -



기다림의 변주, 그 속에 '너무 늦음'의 철학을 내포한 소설들 - 카뮈의 소설 <이방인>, 결혼에 실린 에세이 중 한편 <알제의 여름>, 도스토옙스키 <백치>,  체호프 작품집 <지루한 이야기>, 헨리 제임스 <정글 속 야수>, 디노 부자티 <타타르 사막>, 보들레르 <호기심 많은 자의 꿈>,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사무엘 베케트 <베케트가 본 베케트>-영원한 작가들 총서 중,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의 망각>, 아니 에르노<단순한 열정>, F.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호메로스<오디세이아>....



나다


죽거나 죽음을 유예할 이유들을 스스로 찾게 되면 자기 모순에 빠질 권리와 떠날 권리가 한데 뒤섞인다. 살아야 할 가치는 없지만, 타인들에 대한 의무가 우리를 이 눈물의 계곡에 붙들어둔다. 우리는 이것을 '책임을 진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저마다 죽기 위한 좋고 나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유는 행위보다 덜 중요하다. 이유는 훌륭하거나 어리석을 수 있다. 행위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한낱 시신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시간은 우리에게 점점 더 좁은 선택을, 그리고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한다.
훗날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우리가 경험할 수도 있었을 그 모든 운명,  
포기해야만 했던 그 모든 삶의 갈림길을 생각하면 바보처럼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그대는 줄곧 죽음에 대해 말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죽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나는 나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어떤 사람의 노래는 더 길고, 어떤 사람의 노래는 더 짧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한두 마디 말에 불과하다.

- 카프카 -




생활


젊은 소설가의 첫 책은 대개 자전적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가장 경험이 적은 순간이다. 다른 소설가들, 어쩌면 최고의 작가들은 가장 사적인 것, 자기의 삶이나 자기 가족 이야기 중 가장 내밀한 것은 나중을 위해 간직해둔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비밀을 숨기기 위해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사는 것이 의무라면, 의무를 대충 채웠을 때
적어도 내 수의가 비의처럼 쓰이도록,
포스틴, 죽을 줄을, 그리고 입을 다물 줄을 알아야 해.
질베르처럼 제 열쇠를 집어삼키고 죽을 줄 알아야 해.

- 에디시옹 뒤 디방 <반운反韻>의 마지막 4행 -




모든 소설이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중에는 매우 내밀한 감정을 늘어놓는 데 주체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무거운 입의 미덕? 그건 대개 기질의 문제일 뿐이고, 반드시 냉정의 징표는 아니다. 자존심 때문일 수 있고, 진짜 감정을 싣지 못하는 모멸적인 일이다. 진짜 감정을 싣지 못해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 감정은 영원히 혐오나 경멸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소설은 저자의 가장 내밀한 내적 삶과 외부 세계의 일면을 비추는 일종의 거울이다. 그것은 훨씬 더 진짜 같은 이미지를 제공하기 위해, 현실을 해체해서 다르게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독자에게 세상과 자기 자신에 관해 뭔가를 가르쳐줄 유용한 이미지다. 날것 그대로의 삶은 대개 일관성이 없고 불가사의하다. 거기서 가르침을 끌어내기가 어렵다. 해체된 뒤 소설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재구성된 삶은 우리를 성찰로 이끈다.

읽기는 사생활에 속한다. 책 한 권 들고 혼자가 되는 시간.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쓴 페이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참으로 잘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혼란스러운 삶을 문득 이해할 것만 같다.  한 편의 허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현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2017년 현재 98세 로제 그르니에

<옮긴이의 말>

알베르 카뮈, 로맹 가리, 파스칼 피아, 클로드 루아, 이오네스코, 훌리오 코르타자르.... 등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동료들을 모두 떠나보낸 그는 마치 북적이던 축제가 끝난 곳에 홀로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는 사람 같다. 2013년에는 카뮈 탄생 백 주년을, 2014년에는 로맹 가리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작품세계를 얘기하고, 그들과 함께한 추억을 증언했다.

그는 작가들의 초상을 대단히 섬세하게 그려내는 평론가로도 인정받는다. 클로드 루아<클로드 루아>, 안톤 체호프<내리는 눈을 보라>, 스콧 피츠제럴드 <새벽 세 시>, 알베르 카뮈<알베르 카뮈, 태양과 그늘>, 파스칼 피아<파스칼 피아 또는 죽음의 권리>, 로맹 가리 <로맹 가리 읽기>, 프루스트<프루스트와 그의 친구들> 관한 공동 저작을 펴내기도 했다.

로제 그르니에의 문체는 과시적이지 않고 소박하며 섬세하고 깊이가 있다. 이 책의 원제는 Le Palais des livers이다. 프랑스어 palais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왕궁, 궁전 2) 입천장, 미각 제목을 책의 궁전 혹은 책의 전당이라 하지 않고, 책의 맛이라고 옮긴 건 책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다. 단어의 첫째 의미로 쓰인 것이 분명하지만, 보통사람이 범접하기 힘든 담장 높은 공간의 느낌이 강해 책의 맛으로 옮겼다 - 번역가 백선희 -

스탕달, 플로베르, 카뮈, 도스토옙스키, 프루스트, 체호프, 베케트, 멜빌, 피츠제럴드, 버지니아 울프, 헨리 제임스, 카프카, 보들레르, 포크너, 발레리, 헤밍웨이, 사르트르, 파묵, 페나크, 무질, 에르노....




책의 맛              

저자 로제 그르니에/ 출판 뮤진트리

발매 2016.12.07.






<마무리>
로제가 기억하는 모든 이야기 중 몇 가지가 아마 여기에 덧붙여지고 한 줄 한 줄 엮였을 테다. 많은 작품들의 이름이 오르고 내려진다. 그 작품 속에서 살다 온 사람이다. 자신의 취향보다 그들(작가, 음악가,예술가)과 맺은 우정을 더 아낀다. 속 빈 우상들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다시 읽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점점 길어지는 인간의 수명은 사랑의 수명보다 훨씬 길다.
우정의 수명, 문학/음악/예술에 대한 취향의 수명보다 길다.

나는 예전에 큰 열정을 느꼈던 작가들에 대해 지금은 전혀 관심이 없다.
내 관심사가 달라졌거나 아니면 그 작가들이 표현하는 관심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이미 그 작가들을 두루 섭렵했기 때문에 그들과 만나는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좋아하게 되어 내가 그 작가들과 맺고 있던 조금은 독점적인 우정(썩 좋은 감정은 아니다)이 훼손된 건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내 변덕이 그들의 작품을 다시 읽을 용기를 앗아가, 그냥 멀리서 그들을 존경할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과거의 작가들과 전적으로 사적인 관계를 창출한다.
그들을 결코 보지는 못하지만 소중히 여긴다.
수 년, 수 세기의 세월이 그들과 우리를 갈라놓고 있을지라도.

- 로제 그르니에 <책의 맛> 77페이지 , 120페이지-




'진짜 사생활은 글쓰기다'란 말에 공감했다. 진짜 감정을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글 쓰는 것 자체가 그래서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 실제 감정을 모르고, 아니면 착각하고 쓴다면 가짜 감정이고, 가짜 글이 될 것만 같다. 내 감정을 모르고 빙글빙글 돌려쓰는 글을 자주 쓴다. 정말 내 감정을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한 편의 허구가 나에겐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만, 그것만으론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실 속에 난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감정 표현이 둔감해지곤 한다. 슬퍼지려 한다, 기뻐지려 한다쯤에서 멈춘다. 감정이 폭발하지 않는다. 그냥 제스처에 불과하다. 그래서 진짜 감정을 원하고, 살아있는 느낌을 원한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이렇게 된 것은 모든 일에 상처받지 않고 외면하는데서 단련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타인에게 준 상처도 아픔도 모르고 둔감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당신이 나를 미워한다면, 슬프게도 왜 미워하는지 나는 영원히 모를 것만 같다.

이 책에서 너무 많은 작품과 작가의 이야기가 서로 앞다퉈 나와서 사실 거의 스쳐 지나가버렸다. 그중에서 카프카와 로맹 가리만이 낸 시선을 멈춰다. 로제 그르니에는 로맹 가리가 자신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마도 난 작품이 살아남을 작가들 중 한 명일 거야

- 로맹 가리 -



로맹 가리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대단히 정직하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 것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말이 틀리지도 않았고 말이다. 카뮈에 대해서 훨씬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카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나 보다. 카뮈의 일거수일투족 모르는 것이 없다. 로제 그르니에가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역사가 되고 있다는 말이 와 닿는 순간이었다.




번역가 백선희가 옮긴 책으로 <웃음과 망각의 책> <레이디 L>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울지 않기> <흰 개> <햄릿을 수사한다> <예상 표절> <하늘의 뿌리> <내 삶의 의미> 등이 있다. 내가 읽은 책 중 이 분이 번역한 책이 많다.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번역을 하다 보면 ‘끼어들고 싶은’, ‘덧붙이고 싶은’, 혹은 ‘바꾸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있다. 배반의 유혹이다. 저자의 것이 아닌 내 목소리를, 내 색채를 내고 싶은 배반의 유혹을 누르고 저자 뒤로 물러나는 것이 번역자가 취해야 할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백선희 / 번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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