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블로그는 오랜 친구가 되었습니다. 끄적끄적 써오기를 15년이지만, 거의 10년분은 비공개로 처리하고 말았습니다. 감정의 찌꺼기 처리소로 사용했기에 아주 곤란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것 또한 저라는 생각이 들어서 삭제 대신 저만 볼 수 있도록 비공개 처리를 했습니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찰스 디킨스, 루이제 린저, 헤르만 헤세 등은 2007-2014년까지 좋아했던 작가들이었습니다. 장르소설도 한창 좋아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장르 소설을 즐겨 읽고 있습니다. 대신 만화를 끊었느냐? 사실 그것도 아닙니다. 중간의 공백기가 분명 있었지만, 지금 다시 활활 타올랐거든요. 여전히 만화책은 재밌고, 흥미진진합니다.
책 리뷰를 제대로 해야 된다는 생각이 없었던 저였습니다. 직장생활 10년 차, 서른 중반 이것은 저에게 어떤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졌던 때였습니다. 권태기였다면 권태기였고, 미래는 언제나 불분명했습니다.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2014년 11월 25일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을 시작으로 독서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 어떤 마음이 저 스스로 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2007년부터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대여하고 전자도서관을 이용하며 다양한 책을 마구잡이로 읽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펼쳐서 다 읽는 것도 아니었지만, 흥미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 읽고 싶어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즐거워서 책을 읽는 거랍니다. 내가 허용하는 유일한 책 읽기 방식이 그거예요. 책 읽기를 행복의 한 형태로, 기쁨의 한 형태로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보르헤스의 말-
나만의 문학작품을 만나다
책을 읽고 있지만, 제대로 읽고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읽고 싶은데로 읽어나갔을 뿐입니다. 역사소설을 좋아해서 <불멸의 이순신> <토지> <삼국지>를 느리게 읽어나가기도 했습니다. 방향 없는 독서는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쯤 습작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도 어떤 바람이 불어왔는지도 모릅니다. 우연이지만, 좋은 블로그 이웃과 좋은 작가와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이 아마도 저에게는 가장 중요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시간을 그저 흘러 보냈다면 다시 불러오기 힘들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별... 나만의 작가를 만났습니다. 앞서 소개한 글입니다. 저는 로맹 가리와 파스칼 키냐르라는 두 작가에게 닻을 내리고 안정적으로 독서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더 좋은 작가와 작품을 들여다보며 블로그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풍경....(카테고리)
소설의 세계 사유 문학 실존 문학 메타포 문학 여성문학공간 고대 철학 현대 철학 단단한 독서 세계 공부법 에세이 요리 소설 실용서
이것은 별... 에서는 전작을 읽을 작가별로 글을 모았고, 이것은 풍경... 에서는 제가 생각하는 키워드로 나누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항목은 실존과 메타포입니다. 여기 작품과 작가들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나름 어렵게 읽어냈어서 가장 뿌듯했고 그래서 기억에 오래 남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과 작가가 좋아져 버리면 한 작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작가의 전작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또 이것은 별... 에 한 명의 작가가 추가가 되었습니다. 그 작가는 바로 프란츠 카프카입니다. 밀란 쿤데라의 산문을 읽으면서 더욱 프란츠 카프카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카프카 소설은 한 해에 한 권만을 목표로 읽자고 다짐할 정도로 한 번에 읽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독서가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는 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말과 그림을 찾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때입니다. 한 작품을 떠올리면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초반에는 전혀 알 수 없다가 독서 중후반을 가다 보면 알게 되곤 합니다. 그러고도 도저히 모르겠다는 말이 연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작품은 언제나 로맹 가리, 파스칼 키냐르,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이었습니다. 언제나 저에게 어려움을 주는 작가들의 작품을 저는놓을수가 없었습니다.
실존과 메타포
소설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메타포라고 한다면, 저의 이런 카테고리 구분은 사실 무의미합니다. 저에게 더 기록적인 의미로 구분했을 뿐이고, 개인마다 더 관심이 가고 의미 있는 키워드로 꾸며도 좋습니다. 어떤 의미로 남기느냐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알베르 카뮈 <이방인>은 저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논란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오독을 해도 그만큼 무방하다는 뜻도 됩니다. 똑같이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작품들입니다. 누군가 옳고 그른지를 가르는 비평을 했다면 그것 역시 틀리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하나같이 쓸쓸한 작품들입니다. 눈물 한 방울 떨어질 것 같은 아련함이 있습니다. 일생은 그렇게 한 숨 짓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존과 메타포의 구분은 작가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였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작가의 생각이 항상 궁금했습니다. 저는 책의 비밀스러움을 파헤치고, 함정을 잘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처음 백 페이지에서 답을 찾으려고도 했습니다. 성급했고, 집요했고, 저는 무덤 속 작가를 깨우려는 상상도 했습니다.
작가가 펼쳐 보인 한 폭의 그림에서 저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들춰 보아야 했습니다. 숨은 의미는 저에게 보석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눈물 한 방울이기도 했습니다. 기쁘지만 슬픈것들로 채워야 했습니다. 모든 것은 인류애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독서의 기쁨
저는 위의 작품들을 읽고 가슴에 고이 접어 두었습니다. 언제나 꺼내 볼 수 있도록 가까이 두었습니다. 잊히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해낼 것 같습니다. 저에게 이것은 별... 이것은 풍경... 이되었습니다. 책 한 권, 한 권으로 제 인생의 풍요로워졌습니다. 앞으로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독서의 기쁨을 글로 표현하기엔 아직 저의 글쓰기가 부족합니다. 비논리적인 부분도 있을 테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독서에서 글쓰기로의 전환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시 브런치 북이 되기까지 여러 번 편집의 과정을 거치겠지만, 제 생각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되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면서 그 어느 때보다 저에 대해 알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일지도 모릅니다. 독서로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모두가 알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활동도 그것에 동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참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