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와 파스칼 키냐르
나만의 작가를 만나기.... 아직도 진행 중이고, 그럴만한 가치는 접어두고서라도 저는 계속 그 사랑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도대체 이 작가들은 왜 나를 그런 구렁텅이에 빠트리는 것일까? 저는 아마도 이런 질문과 함께 사랑이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로맹 가리 <새벽의 아침>을 읽으며 저는 밤잠을 설쳐가며 로맹 가리가 서 있던 그 길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있었는지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달라던 그였지만, 작품은 그가 살아있는 세상으로만 보였습니다. 그의 가족사 관심 갖지 않고자 했지만, 파파라치처럼 따라붙었습니다. 결국 노인이 되어서 죽었을 사람인데, 제 작가는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고 거칠게만 굴었습니다.
프랑스 문학이면서 역사이면서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는 저에게 읽는 것은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않았고, 다만 보여줬을 뿐입니다. 그것은 역사이기도 했고, 사회, 고전, 철학, 인류애 등등 살아오면서 단 한번 고민한 적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가벼운 인간이니깐요.. 그런데도 그랬던 제가 그것을 무겁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모르겠지만, 더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와 저의 맹약이 맺어졌습니다.
지금도 쓰고 보니 저의 생각이 이랬다는 것을 알아챘을 뿐입니다. 흩어져 있던 저를 불러 모아 다구 쳤더니 실토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영원히 묻혔을 이야기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을 이야기이지만, 저는 제 작가와 한 맹약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가볍고 언제 떠날지 모를 1인이지만 이렇게 기록에 여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라도 괜찮다면 무수히 많을 http://를 이어가겠다고 다짐하곤 합니다. (다시 읽곤 유치해서 몸둘바를 모를 글을 써대고 있음을 알아버렸습니다. 하하하)
자기 앞에 끝없는 세계가 펼쳐져 있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
그는 배를 그리고 닻을 그리고 탑과 말과 새를 그린다.
마지막에 그는 자신이 그려온 것들이 자기 얼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작가가 뒤에 남기는 것은 자기가 써온 글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글에 그것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각각의 글은 빈약할 수 있으나
그 총합은 작가가 남기는 자신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게 작가의 운명.
- 보르헤스의 말 -
저는 브런치 북을 만들고 있습니다. 목차를 완성하고 글 채우기를 하고 있습니다. 로맹 가리와 파스칼 키냐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한 참을 중얼거릴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습니다. 반복해서 그들의 작품을 읽고 리뷰를 남기고 어렵게 그들을 알아갔던 시간이 저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읽는 동안엔 때 아닌 고통도 수반되었습니다. 제 영혼을 털어서 등가 교환하듯이 맞바꾸어 얻어낸 기쁨 같기도 했습니다.
나만의 작가와 동행하는 독서는 꼭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독서 버전이 있어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만 보다가 20대가 되어서 문학을 접하고 여러 장르를 통해서 겨우 이곳에 안착한 경우였습니다. 특별하다고 여겨질 만한 나만의 작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감정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가들이었습니다.
로맹 가리는 시작이었다면, 파스칼 키냐르는 끝이었습니다. 3년 독서과정에 있어서 시작점과 끝점을 찾자면 꼭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은 단번에 읽지 못하고 거의 한 해에 걸쳐 오래도록 읽었습니다. 리뷰에 어떻게 하면 이 책의 느낌을 고스란히 남 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엮어 냈습니다.
여전히 저는 그들의 전작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3년의 독서과정은 제가 끌어올릴 수 있었던 열정의 시간이었고, 지금은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잠시 쉬어가자' 그러면서 한 권 한 권 이어서 읽고 있습니다. 다만 아주 느리기 때문에 멈추기도 하고, 생각의 정리가 바로 되지 않아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해 물 위의 떨어진 나뭇잎처럼 표류되곤 맙니다.
작가의 작품 연보 차례로 적어보곤 되도록 연차별로 읽어나가려고 했습니다. 처음에 로맹 가리 작가의 작품 중 추천받은 책 <자기 앞의 생> <새벽의 약속>을 우선 읽었습니다. 다음에 저 스스로 작품 연보를 찾아 손에 닿는 대로 읽어나갔습니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프랑스 콩쿠르상까지 받았습니다. 권총 자살 후 그는 에밀 아자르가 자신이었음을 밝혀지도록 했습니다.
저는 에밀 아자르도 또 하나의 삶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둘은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란 생각을 합니다. '로맹 가리에게 있어 에밀 아자르는...' 이런 생각을 이어가려 하면 닿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에밀 아자르로서의 마지막 작품 <솔로몬 왕의 고뇌>를 그저 읽기엔 버거워 그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어내곤 다시 진지해진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쩌면 작품 하나하나를 따로 보지 않고 전체를 하나로 보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전체를 보곤 작가를 떠올립니다. 그것이 그가 말하려 했던, 아니 보여주고자 했던 큰 그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철두철미하여 그렇게 보이도록 한 것이라면 그들은 정말 천재적인 작가인지도 모릅니다.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은 유독 바다를 많이 떠올리게 합니다. 생각이 바다 깊은 곳까지 가라앉아 부유하듯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런 산문과 소설을 연보대로 읽고 필사를 중간중간 이어가며 되도록 충분히 느끼려고 했습니다. 거의 모든 의미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중 유일하게 남은 제 리뷰의 텍스트 만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 밖 육성을 들으면 더욱 작가와 가까워진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작가를 만나기 전, 예로 들어 보르헤스나 밀란 쿤데라와 같은 작가는 작품보다 그들의 산문을 우선 읽어갔습니다. 저에게 그들의 작품은 고난위도 레벨이어서 마음 편하기 읽어나가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은 행성과도 같아서 진입하지 못하고 이탈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여 착륙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저에게 작가의 작품은 별과 같아서 제가 사랑하는 작가와 작품을 별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래도 너무 많은 다수의 작가와 작품들이 있기에 놓칠 수 없는 풍경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펼쳐진 이미지들이 보이듯이 손 끝으로 훑어보곤 합니다. 닿을 수 있을 것처럼 아련하게 보곤 손 끝을 떨어트리곤 합니다. 언젠가는 닿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지요...
브런치 북 <독자이면서 작가가 되자!>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도달하고 있는 독서의 완성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좋은 정보를 전달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제 독서의 기쁨이 자랑만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은 아주 가까이에 있고, 누구나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당신의 작가를 만날 차례입니다.
로맹 가리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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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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