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언어를 탐구하다.
책의 맛
작가의 언어를 녹이다
고독없는 기쁨이란 없다
독서의 체험
작가의 글... 독서의 길...
작가의 언어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나, 저는 작가들의 글을 채집하기 시작했습니다. 2015년 5월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좋은 글귀를 만나면 그날그날 포스팅해 두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제가 채집한 글들의 집합채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작가들의 영혼의 결정체와도 같은 글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습니다. 누적된 결과물인지, 무의식 속에서 우연을 가장한 것인지 도저히 제가 알 수 없는 그 과정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이 무엇이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어쩌면 작가들이 본 그것이 글이 되어 내려왔을 때'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
작가는 단어를 쓰기 위해 '그것'을 탐색하며, 애원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글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면서 또한 누군가의 눈앞에 드러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작가의 노고와 작가의 일탈에서 빚어낸 결과물을 독자는 '자기의 것'으로 탈취해 버리기도 합니다.
한 번에 자기 것으로 탈취하는 것이 독자이고, 그것이 저라면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독서의 세계는 우리를 더 먼 세계의 바닥으로 데려갑니다. 소설가만이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유일한 거짓말쟁이며, 가장 멋진 거짓말쟁이는 어쩌면 프란츠 카프카 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소설은 하나의 커다란 메타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채집한 글들을 모아 위의 두 문단을 만들어 냈습니다. 제 글이 아니면서 제 글이 되어버린 글이 되었습니다. 제 의식은 또렷한걸 보니 누적된 결과물입니다. 여기에서 저도 모르는 생각의 깊이에 따라 무의식이 발동되기도 할 테지요. 작가의 글과 저의 무의식이 녹아내어 만든 글이 온전히 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작가는 머릿속에 자신의 극단을 한 무리씩 가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에겐 오십여 명이, 내겐 십여 명이,
테네시 윌리엄스에겐 다섯 명이, 헤밍웨이에겐 한 명의 극단이 있다.
그러나 베케트에겐 아무도 없다.
- <고어 비달과의 대화, 2005> -
파스카 키냐르는 <떠도는 그림자들>에서 샬럿이 묘사한 에밀리 브론테 글이 있습니다. 저는 브로테 자매의 소설과 제인 오스틴 소설을 읽으며 문학에 한 발 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녀들의 글이 무척 좋았습니다. 고독하지만 강인한 내면이 만들어낸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와 여성상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어떤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한다는 것은 곧 그 작품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밀란 쿤데라의 말이며, 그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이 그의 친구 브로트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작품을 소개하는 일, 그것을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의무감으로 소개하고 소개했듯이 그렇게 이어져 내려온 명작이 고스란히 남았고, 그마저도 못 이룬 수많은 작품들이 사라졌습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저자 보후밀 흐라발은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립니다. 저는 이 책을 재독 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읽을수록 이 책은 단숨에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다시 꼭 읽어야게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가 사랑한 체코에 무엇이 있길래 그는 그 사랑 버리지 못했나, 그의 독특한 사랑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사랑이 궁금했습니다. 그런 사랑법은 아주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progressus ad orifinem 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regressus ad futurum 미래로의 후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 보후밀 흐라발 -
발자크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시인과 작가들'에 대해 기법도 능하고 발상도 능 한 사람, 거기다 어떤 불가해한 정신 현상이 일어나 모든 상황 속에서 진실을 예견할 수 있는 일종의 천리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두뇌 속에 우주를 들어오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일까, 아니면 그의 두뇌가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파기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나의 세계가 흔들릴 정도로 읽기란 어떤 읽기를 말하는 것일까요?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에서 책 읽기를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폴 발레리 <테스트 씨>에서 그는 '나는 나 자신에게 내면의 섬을 하나 만들어주고서, 그 섬을 받아들이고 견고히 하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테스트 씨는 어느 날 이러한 상태의 생생한 기억으로부터 탄생했다.'라고 말합니다. 작가와 독자는 어디서 서로 정신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은 죽어있고 생명이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파스칼 키냐르 독서 행위보다 더 먼저 있던 경험, 독서보다 훨씬 깊고 훨씬 동물적이고 훨씬 본래적인 것, 독서보다 상류에 있던 이런 '같고 다른' 경험을 독서에서 느끼는 것, 그것이 진짜 독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독서와 글쓰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본래의 것이 무엇인지 점차 그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 네 시선은 무엇이냐?
-. 내 책의 시선이오.
-. 네 들음은 무엇이냐?
-. 내 책의 들음이오.
-. 네 호흡은 무엇이냐?
-. 내 책의 호흡이오.
-. 네 바람은 무엇이냐?
-. 내 책의 바람이오.
-. 네 행운은 무엇이냐?
-. 내 책의 행운이오.
-. 네 죽음은 무엇일 것이냐?
-. 책의 마지막 지면에서 나를 훑는 죽음이오. 우리가 공유한 모든 죽음의 죽음이오.
에드봉 자베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독서와 글쓰기는 더 이상 이분법으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작가의 글을 탐미하다가 작가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고, 작가가 만든 세계가 더 이상 작가만의 것이 아니게 되고 맙니다. 나의 세계가 되는 순간 독서는 읽는 것에서 벗어나 독서의 경험이 되고, 저만의 루트가 만들어집니다.
들판이 될 수도 있고, 산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빙하의 일부가 되어 망망대해를 떠다닐 수도 있고, 해저를 탐험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우주로 작은 티끌 하나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독서라는 행위가 무엇이었길래 저는 해체되어 사라지는 것일까요?
작가는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린 사람들? 또는 한 발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까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리그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늦었지만 어서 와 여기는 처음이지? 그런 인사말이 들리는 듯합니다.
무엇이 행복이었냐고 한다면 그런 질문은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독서하지 않았을 때도 분명 괜찮았습니다. 독서를 하고 난 이후는 조금 더 괜찮다고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독서를 하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계속 읽어나가고 싶습니다. 어떤 길이 내 앞에 놓일지 아직도 많은 기대에 차 있습니다. 고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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