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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Jan 06. 2021

인간을 사랑할 것, 진심으로 사랑할 것

헤세는 우리 곁에...

지금 그대 마음이 불안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진정한 자신'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를 알고

나의 길을 가면서

행복을 귀하게 여기고

나를 사랑하면

불안은 다가오지 않을 것이며,

설령 있다 해도 소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좀 더 자주 푸른 하늘 아래에 서보자.

좀 더 자주 나무 밑에서 쉬며

좀 더 자주 혼자가 되어보자.

좀 더 많은 시간을 

아름다움과 위대함의 비밀을 푸는 데 써 보자.


삶의 결을 이전과 다르게 채우다 보면

비참하고 초라한 마음에서 벗어나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음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결코 천국이었던 적이 없다.

옛날에는 평화롭고 좋았다가

오늘날 지옥 같은 탁한 세상이 된 게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진흙투성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외면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이곳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사랑과 신념이 필요하다.

당신 마음속에 얼마만큼의 사랑이 있는가.

당신 가슴속에 어느 정도의 신념이 있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







사랑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살게 한다. 살아내게 한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자 존재 이유다.

- <헤세의 인생공부> 사랑의 존재 이유 中 -



**

잃어버린 소리


언젠가 어린 시절에

나는 목장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때, 아침 바람에 노래 하나가

조용히 실려 왔다

푸른 공기의 소리,

또는 무슨 향기, 꽃향기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어린 시절 내내 영원토록 울려 퍼졌다

그 후 나는 그 소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가슴 깊은 곳에서

살며시 그 소리가 다시 울려온다

지금 나에게는 모든 세상 일이 아무래도 좋고

행복한 사람들과 처지를 바꾸고 싶지도 않다

오직 귀 기울이고 싶을 뿐

그 향긋한 소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리고 그 소리가 그때의 그 소리인지,

조용히 서서 귀 기울이고 싶을 뿐








좋든 싫든 우리는 언제나 저 별을 따른다.
빛과 어둠을 지나 우리의 운명은 저 별을 향해 굴러간다.
우리는 기꺼이 저 별을 따른다.

- <헤세의 인생공부>  이별을 하며 中-





**

니논을 위하여 

(Ninnn Hesse : 헤세의 세 번째 아내로, 1931년 결혼해 1962년 헤세의 임종을 지킨 뒤 1966년에 세상을 떠났다.)


바깥에는 별이 바삐 움직이고

모든 것이 불꽃을 날리고 있는데

이렇게도 생활이 암담한 나의 곁에

네가 있겠다는 것.


분망 한 인생살이 속에서

하나의 중심을 네가 알고 있다는 것

이것이 너와 나의 사랑이 

나를 위한 고마운 수호신이 되게 한다.


나의 암흑 속에서, 너는

참으로 은밀한 별을 느낀다.

너는 사랑으로 다시 나에게

삶의 달콤한 핵심을 생각케 한다.













얼마 전에 헤세를 (마음속에) 담았기에 헤세의 글을 다시 본다면 더 좋은 말을 들을 수 있겠지 생각했어요. 헤세는 헤세 다운 말로 저를 토닥토닥해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여서 그가 느꼈던 세계 2차 대전을 떠올리기도 했고, 그의 시련과 고통에서 무엇이 버팀목이 되었는지 짐작해 보았습니다. 역시나 사랑 그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은 사랑인데 사랑은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연한 조국이 다른 이들에겐 조금 다른 조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무심결에 들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느끼는 소외감 그 뒤로 자신들의 조국에 받치는 열정... 내 뿌리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찾는 조국이란 어떤 것일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남독일 뷔르템베르크 칼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는 스위스 국적 취득 이전까지 러시아령 에스틀란트 태생으로 러시아 국적자였으며, 그의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는 그녀의 모친 헤르만 군데르트는 선교사이자 저명한 인도 학자여서  헤세는 어릴 적 양가 집안의 선교활동에 의해 동양의 문화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헤세의 작품들은 삶에서 녹아내린 글이자 자신이자 그의 소망이 깃들어진 게 아닐까... 그리고 그의 글 귀에서 시에서 삶의 마무리를 엿볼 수 있는 한순간이 눈앞에 스치듯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에 관하여


<독서의 3가지 유형>


1. 순진한 독자

2. 유희 본능 독자

3.'훌륭한' 독자와는 정반대의 독자

(세 유형 중 어느 한 부류로 반드시 분류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오늘은 둘째 유형에 내일은 셋째 유형에 속했다 모레는 다시 첫째 유형에 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1. 순진한 독자

책은 이끌고 독자는 따라가는 것, 책의 소재는 있는 그대로 수용되고 객관적 실제로 받아들여진다.

소설 속 사건을 평가하거나 혹은 관습에 불과한 미학의 잣대로 작품세계를 재단하며 작가를 평가한다.


2. 유희 본능 독자

어떤 책이 지닌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가치를 꼽을 때 책의 소재나 형식 따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무엇이든 열 가지, 백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작가가 소재를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붙들린 작가의 모습을 확인하며 재미있어한다. 

작가의 이런 동요와 불안정성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큰 매력과 가치를 지닌다 여긴다.

독자는 마부를 따르는 말이 아니라 마치 사냥꾼이 짐승의 자취를 더듬듯 작가를 추적한다. 


3.'훌륭한' 독자와는 정반대의 독자

개성적이고 자신에게 충실해서, 무엇을 읽든 완전히 자유로운 태도로 대한다. 

작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어찌 보면 완전히 어린 아이다)

모든 것과 더불어 유희하는데, 어떤 관점에서 보면 창조적이다.(활자화된 모습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그런 충동과 영감)

다만 셋째 단계의 독자는 더 이상 독자가 아니다. 

만약 지속적으로 이 단계에만 머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아예 아무것도 읽지 않을 것이다.

이 단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 또한 불충분하고 미숙한 독서자다.

이 단계의 사람은 훨씬 더 훌륭한 독자, 훌륭한 청자, 더 훌륭하게 해석하게 될 자이기도 하다.

이 셋째 단계에 있을 때 당신은 독자이기를 멈추고 문학도 예술도 세계사도 해체되고, 오직 당신 자신으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p186-193)






<글쓰기와 글> - 1960년 -


글은 인간만 쓰는 게 아니다.

손 없이도 펜이나 붓, 종이나 양피지 없이도 글은 써진다.

바람과 바다, 강과 시내가 글을 쓰고, 동물들도 쓰며, 어디선가 대지가 이맛살을 찌푸려 강물의 길을 막고 산이나 도시 하나를 흔적 없이 날려버릴 때면 땅도 글을 쓴다.

하지만 겉보기에 맹목적인 힘들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을 글로, 다시 말해 객관화된 정신으로 바라보려 하고 또 그럴 줄 아는 것은 오로지 인간 정신뿐이다. (p66)



모든 글은 잠시 후건, 수천 년이 지나서 건 언젠가는 다 사라진다.

세계정신은 모든 글과 그 모든 글의 소실을 읽으며 또 즐거워한다. 

우리가 그중 몇몇이나마 읽고 그 의미를 헤아리면 다행이다.

어떤 글에도 없고 그러나 모든 글에 내재되어 있는 이 의미는 언제나 한 가지다.

나는 내 글에서 나름대로 그 의미를 만지작거렸고, 조금 구체화하기도 가리기도 하였으리라. 

나라고 무슨 새로운 것을 말하지도 않았고, 말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많은 현인들과 시인들이 이미 누차 이야기했던 것이니, 그때마다 조금씩 달라서 명랑할 때도 비감할 때도 있었으며, 쓰디쓰기도 달콤하기도 했다.(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p69)







<시에 대하여> - 1918년 -


때로 어떤 시는 시인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여 이완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기쁨과 감동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시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고 공감할 만한 것이 시에서 표현된 경우 이리라.

하지만 이것도 결코 확실하지는 않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악순환이 시작된다.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이 사랑을 받으니까, 자꾸 그런 류의 시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즉 시의 근원적·원초적·치유적 기능과는 동떨어지는 채 오로지 아름다우려고만 한다.

이런 시들은 애초부터 타인, 즉 청자와 독자를 겨냥해 쓰인다.

이들은 더 이상 한 영혼의 꿈, 춤사위, 절규가 아니며, 체험에 대한 반응도 더듬더듬 읊조리는 소망이나 마법의 주문도 아니며, 현자의 몸짓도 광인의 기행도 아니다.(p95)


'아름다움' 시들이 가끔 너무나 지겹고 미심쩍어진다.

마치 길들여지고 다듬어진 모든 것들처럼, 교수들과 공무원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때때로 자로 잰 듯 정확한 세상에 진절머리가 날 때면, 가로등을 박살내고 사원에 불을 놓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런 날이면 이 '아름다운' 시들은 저 신성한 시성들의 것에 이르기까지 지다 어느 정도는 마치 검열을 거친 듯, 거세된 듯, 지나치게 지당하고 유순하며 고루하게 느껴진다. 

그럴 땐 '형편없는' 시에 마음이 끌린다.

그때는 어떤 것도 전혀 형편없게 느껴지지 않는다.(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p96)




<'문학에서의 표현주의'에 대하여> - 1918년 -


서로 사랑하지 않는 한,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또한 세계를 외면보다 내면에서 경험할 때에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고 하나, 실은 우리 정신이 사랑이라는 그 가장 따스한 힘을 발현시키고 흘러넘치게 하는 데는 그 대상들이 기꺼이 계기가 되어주는 것이다.


어떤 작가든 내 마음에 와 닿아 그에게 온전히 마음을 다해 귀 기울일 수 있는 순간에는 사랑하고, 그러다가도 또 그가 내게 전류를 공급하는 도체가 되어주지 않는 순간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많은 시간을 독서에 바치면서 내가 터득한 것은, 우리는 고트프리트 켈러(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존재로서 '스위스의 괴테')를 좋아하는 동시에 베르펠(드라마 분야에서는 먼저 표현주의의 대표)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정원에서 횔덜린(독일시인,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여 낭만적·종교적인 이상주의를 노래한 그의 시)을 읽으며 온종일 행복에 젖기도 하고, 쉬켈레의 장편 <벤칼>의 어떤 부분에서 넘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글 쓰는 밤> - 1928년 -


내가 썼던 산문 작품들은 거의 모두가 영혼의 전기들이다.

사건과 갈등, 스토리 중심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독백으로, 이들 가공의 인물이 세상과 혹은 자아와 맺는 관계들에 주목한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할 고비이며, '가공의' 인물과 관련된 모든 생각과 느낌들이 극도로 첨예하고 명료하고 급박하게 내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이다.

나의 작품들 하나하나마다 그런 시간이 있었으며, 끝내 미완성으로 발표하지 못한 작품들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후자의 경우는 이런 추수기를 놓치자 어느 순간 작품의 인물과 쟁점이 내게서 멀찍이 등을 돌리고 그 절박함과 중요성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카멘친트나 크눌프, 데미안 등이 지금에 와서는 절박하게 느껴지지 않듯이 말이다.(p111-112)



저녁 내내 몰두했던 글쓰기가, 이 년 전에 환상처럼 물든 나타난 한 인물상을 끈질기게 붙들어 형상화하는 것이, 이 필사적이고 도취적이며 소모적인 작업이 진정 의미 있고 불가결한 일이었을까?

카멘친트와 크눌프, 페라구트로 모자라 또 한 명의 인물상, 또 하나의 화신을 만들어 내는 일, 조금씩 달리 배합하고 조금 다르게 변형시켰을 뿐 결국 나 자신의 본질을 작품 속에서 또 다른 인물로 구현하는 작업이 과연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p113)



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밤새 곱씹었다.

그 대답이야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르는 바 아니니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크눌프와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그리고 골드문트를 눈앞에 떠올리며, 그들의 아픔을 곱씹고 그 쓴 잔을 다시금 맛보았다.

그들은 모두 형제요 동류이되 동어반복이 아니며, 다만 질문하고 고뇌하는 사람들이요, 삶이 내게 안겨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나는 행복한 이들의 모든 행복, 그들의 모든 명성을 다 준다 해도, 그걸 얻는 대신 나 자신의 생각과 고뇌를 조금이라도 내놓아야 한다면 내겐 일말의 의미도 없으리라 

나의 '낭만적' 추구의 가치를 조금도 인정해 주지 않고, 반대할지라도, 나는 내 일을 계속할 것이며 나의 주인공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확신을 마음에 품고 나는 마치 거인처럼 당당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헤르만헤세(글 쓰는 밤, 1928년)





나름대로 저에게 이번 겨울이 방학이기도 해서 헤르만 헤세를 읽으며 편안함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괜찮으면서도 불안함에 떠는 저를 느끼기도 하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불안함이라 딱 한 가지를 꼽을 수 조차 없습니다. 항상 긴장상태에 놓이다가도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이건 저만 그런 게 아니라 현대사회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읽은 글귀는 한순간에 다 사라지고 몇 글자만 저에게 남습니다. '인간을 사랑할 것, 진심으로 사랑할 것' 이 글귀가 저에게 남았는데 채찍질과도 같았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제가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채 저 자신마저도 버린듯한 그런 느낌이 강하게 몰아쳐 부끄러움에 숨을 곳을 찾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 책임을 회피하고만 싶기도 했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어 졌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마 그 어려운 일을 해내려고 매번 다시 무너지는 자신을 일으키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물론 잘하고 있을 테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잘 해내고 있을 겁니다. 나를 믿어주는 일 거기에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 될 테고 분명한 것은 그 시작으로 모든 일이 다 잘 풀려나갈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말자는 것입니다.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여기 브런치에도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로 여러 가지 글이 쓰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앞으로 자주 글을 남기려 합니다. 일단 하던 공부를 마치고 올 하반기부터는 한 달에 2편의 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없는 세상이 우리에게 있어왔고 다시 그날이 평범한 날들로 채워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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