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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pr 04. 2023

가벼운 마음 - 크리스티앙 보뱅 저

상상해 보라. <어린 퓌그가 높이 자란 풀들 사이로 달리기 시작한다>라는 문장을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저 p30,

퓌그(fugue 하나의 성부(聲部)가 주제를 나타내면 다른 성부가 그것을 모방하면서 대위법에 따라 좇아가는 악곡 형식. 바흐의 작품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내가 원했던 삶은 

요약할 수 없는 삶

음악 같은 삶이었다.



늦은 시각이라 인적이 없어진 해변으로 도망친다. 나는 숨을 쉬고, 노래한다. 벌거벗은 별들처럼 알몸이 되어 별빛 가득한 물 속으로 몸을 담근다. 검푸른 물속에서 해안은 곧 시야에서 벗어난다. 잘못된 방향으로 헤엄칠까 봐 두렵다. 어둠 속에서 헤엄치고 있어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 죽음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p50



나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설명을 잘했는지 모르겠다. 잉크는 구매할 수 있으나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가벼움이 오거나 안 오는 건 때에 따라 다르다. 설령 오지 않을 때라도, 가벼움은 그곳에 있다. 이해가 가는가?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 풀잎을 씹듯 수천 번 중얼거린 이름에, 쥐라산맥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빛의 요정 안에, 슈베르트의 소나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가난 속에, 저녁마다 덧창을 느릿느릿 닫는 의식에, 청색, 연청색, 청자색을 입히는 섬세한 붓질에, 갓난아기의 눈꺼풀 위에, 기다리던 편지를 읽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다 열어 보는 몽글몽글한 마음에, 땅바닥에서 '팡'하고 터지는 밤 껍질 소리에, 꽁꽁 언 호수에서 미끄러지는 개의 서투른 걸음에, 이 정도로 해두겠다. 



당신도 볼 수 있듯,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벼움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물고 희박해서 찾기 힘들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p68





책의 이야기 속으로..

소설은 서커스단에서 자란 한 여자아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여자아이는 서커스단의 철창 속 검은 털, 노란 별빛 눈을 가진 늑대와 사랑에 빠진다. 소녀는 제 안에 늑대의 순수한 영혼을 간직하며 곡예사, 광대, 곡마사, 조련사 등에 둘러싸여 자란다. 서커스단의 떠돌이 삶조차도 자유에 대한 그녀의 욕구를 채우지는 못한다. 그녀의 이름은 ‘빛’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뤼시’, 빛을 따라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임무라 여기며 가출을 일삼고 그때마다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리고 방탕한 아이는 아버지의 말 없는 체념과 어머니의 태양 같은 웃음과 함께 매번 돌아온다. 완벽주의자 아버지는 서커스단(축제 업계)에서 묘지 지기(장례업계)가 되며 정착하게 된다.




내 생애 초기의 삶, 
나의 방랑자 생활은 
세상에 대한 볼거리를 끝없이 제공했다.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저 p117




내 늑대의 눈에서 

발견했던 것들

늑대는 나였다.



거인이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자며 나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의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문을 다시 닫기도 전에 그가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꼭 끌어안고 들어 올려 키스를 한다. 나는 초록 커튼이 걸린 방과 구석의 침대 외에는 거의 텅 빈 다른 방을 힐끗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홀한 그의 이, 흡연자의 이를 본다. 누런 이를 가진 괴물의 품속에서.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빠지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아무도 내게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사랑을 한다. 그전에 했던 모든 건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전에 있었던 모든 건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 속에서 처음으로 나는 영원한 나이를 갖는다. 



잠에서 깼을 때, 별들의 왕관을 쓴 어둠 속에 내 연인이 서 있는 모습을 본다. 또 다른 연인이자 오늘 저녁 우리가 구한 단풍나무다. 가지들 틈으로 내 스튜디오를 보았다. 그리고 열린 창문을 통해 안쪽 벽에 비친, 원고에 몸을 숙이고 있는 로망의 그림자를 보았다. 두 아파트 사이의 거리는 10미터. 매우 가깝지만 넘을 수 없는 거리다.  p123-124




이 사랑 이전에 나는 태어나지 않았고, 
이 사랑과 함께 죽었으며, 
없음에서 다른 없음의 상태로 건너갔다.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저 p129



내 마음을 사로잡은 침묵

쥐라산맥 숲속의 침묵

백지 같은 침묵



사랑은 아주 작은방이다.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간다. 유년의 방에서 잠을 잘 생각이다. 작은 역, 더 멀리, 집 한 채, 그 집 역시 비어 있지 않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건 약간의 평화와 단순한 기쁨, 흔하디흔한 공기다. 오후를 집에서 혼자 보낸다. 혼자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은 사랑이 처음 시작되는 순간처럼 달콤하다. p147



나의 늑대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눈에 비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 같을 때라도 실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것과,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 간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생각으로 이 순간에도 노래 부를 수 있다. p154



비밀이 하나 있다. 삶이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안의 가출 소녀다.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 전까지는, 첫 장을 들어 올릴 때 가지는, 어떤 경찰도 그녀를 찾지 못한다. 나는 스물일곱 살이지만 독자들은 나이가 없다. 펼친 책 앞에는 밤 10시가 훌쩍 넘도록 골목에서 놀고 있는 어린 시절만 남아 있을 뿐이다. p162-163




나의 수호천사는 자폐증을 지닌 늑대 아이다. 그는 나를 때때로 침묵하게 하고, 도망가게 하며, 비사교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나의 수호천사는 내 방랑의 여정을 따라다녔고, 내 어깨너머로 책을 읽어 주었다. 

로망의 품에서, 그리고 괴물의 품에서 나를 끌어낸 것도 그다. 그리고 그를 잃었다.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저 p168


우리는 약간의 건초로도 
기뻐하는 당나귀들 
우리는 가볍게 부는 바람을 
몸에 걸친 그림자들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저 p168






책의 이야기 속으로..

기숙 생활을 하며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뤼시는 로망을 만나 결혼해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만난 알방(괴물)과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을 모두 떠난 후 우연히 시작한 영화배우 생활마저 뒤로한 채, 자신이 가진 질문들에 바람을 쐬어주고 그 질문들을 응시하기 위해 쥐라의 호텔 방에 머무르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그늘에 안녕을 고하고, 요양원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와 함께 마지막 여정을 떠난다.

요양원의 할머니를 태우고 떠나는 마지막 여정으로 이끄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침묵하게 하고 도망가게 하며 비사교적인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보살피는 수호천사의 목소리를 따라간다. “가끔은 일단 저질러야 한다. 이해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 일을 왜 했는지 깨닫게 된다’는 믿음으로 어떤 제약으로부터도 해방된 그녀는 "그 후엔, 그때 생각하자”라는 주문을 외우며 가벼운 마음을 향해 나아간다.



       


        가벼운 마음저자크리스티앙 보뱅출판1984BOOKS발매2022.08.22.



프랑스의 대표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동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맑은 문체로 프랑스의 문단, 언론, 독자들 모두에게 찬사를 받으며 사랑받는 작가. 1951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크뢰조에서 태어났다. 평생 그곳에서 글쓰기를 하며 문단이나 출판계 등 사교계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고독한 작가다. 대학에서 tpourpre』를 출간했고 아시시의 성인 프란체스카의 삶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 『가난한 사람들Le Tres-Bas』이라는 작품으로 세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유서 깊은 프랑스 문학상, 되마고상 및 가톨릭문학대상, 조제프 델타이상을 수상한 바 있다.






마무리.


뤼시는 한마디로 통통통 작은 공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였고, 그 아이가 성장해서도 다른 의미로 통통통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인이 되었다. 여기에 크게 뭘 부연 설명할게 있을까 '하고 싶은 데로 해~' 그게 전부였는데 그래서 뤼시가 뭘 하든 좋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늑대는 잊지 않아야 할 대상으로서 유대인을 칭했던가 싶기도 하고, 유년의 기억 그 자체인건가 싶기도 했다. 철창 속에 있던 늑대가 소녀 자신이었고, 가족이라고해서 남편이라고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무엇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들을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는지를 뤼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이라든지 그런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언어의 힘이다. 가벼운 마음. 한결 가벼워진 마음. 어디에라도 이 마음을 부여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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