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극동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오다 우랄 지방 어딘가에서 눈보라에 발이 묶인다. 그 용어를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내 동포들 사이에 묻혀 나는 머릿속으로 그 철학자의 지혜를 찬미하고 있었다.
뮌헨의 그 철학자가 내놓은 정의, 두 마디 라틴어, 공통의 본질을 파고든 참신한 용어, 모두가 하나의 총체적인 명치 아래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를 지칭하는 말, 놀랍게도 설득력 있는 개념, 더없이 다양한 개개인의 삶이 들어 있었다.
사반세기가 흘러 제국은 몰락했다. 야만과 악은 다른 하늘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날엔 거의 잊힌 그 정의가 이제 와서 내게 서표로만 작용한다. 흐르는 세월의 흙탕물 속에 그 짧은 만남의 순간을 기리기 위한.
아버지는 오래된 바이올린을 부엌 화덕에 집어넣고 불태운다. 불길 속에서 현들이 현란한 아르페지오를 발하며 끊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밤과 불타는 니스 냄새, 불길 속에서 신음하는 현들의 단말마를 잊어야 한다. 불길 속에서 끊어지는 현들의 멜로디를 잊기만 하면 된다.
그의 삶 한 단계가 잘려 나갔다는 것. 젊음이 피어나는 시기, 고양된 감정 속에서 꿈꾸는 시기, 여성을 시적 이미지로 바라보면서 다가설 수 없는 그 육체를 신성시하며 사랑의 기적을 갈구하는 시기. 그 무엇도 그의 것이 될 수 없었다.
'베틀쉽 게임'의 열기가 극에 달했던 37, 38, 39년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잠을 자다 일어나, 마치 무슨 악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이곳을 떠나야 했었다.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은 매표소 앞에서 멈추었다. 여직원이 과자 상자에서 장밋빛 알사탕 하나를 꺼내 입 안에 넣었다.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는 사이에도 사탕을 깨물며 입을 우물거렸다. 알렉세이는 놀라 어안이 벙벙해진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창구 너머에선 마술적이라 할 만한 세계가, 사탕과 미소 어린 하품으로 이루어진 경이로운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방금 전에 그가 쫓겨난 세계였다.
<어느 삶의 음악> p50
"내 연주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작게 소리를 내질렀다. 뒷좌석 차창에 붙은 아름다운 밤나방 한 마리가 수수께끼 같은 작은 글자로 뒤덮인 날개를 파닥이며 창유리에 꽃가루 자국을 남겼다. 이 두꺼운 창유리를 통해 바라보듯 그는 연주 홀을 조명이 환하게 들어온 무대와 피아노를 향해 걸어가는 한 젊은이를 상상했다. 가슴 에이는 환영 속에 떠오른 이 삶을 그는 잠시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그 자신 없이 이어지고 있는 삶이었다.
<어느 삶의 음악> p57-58
그는 연주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밤을 가로질러 전진했다. 얼음과 나뭇잎과 바람의 무수한 단면들로 이루어진. 이 밤의 투명하고 불안정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안에 불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도 후회도 없었다. 그가 헤치고 나아가는 이 밤은 불행과 공포와 만회할 수 없이 산산조각 나 버린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모두가 이미 음악이 되어 오로지 그 아름다움으로 존재했다.
<어느 삶의 음악> p119
책 속으로
화자는 다소 경멸적인 태도로 그들을 ‘호모 소비에티쿠스’라 칭한다. 그들은 스탈린 체제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겪으면서 부조리한 상황을 참아내고 희생을 감수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화자는 자아를 상실한 이들을 비판하며 그 집단에서 자신을 분리해내려 노력한다. 그 순간, 어디선가 흘러오는 음악 소리를 듣게 된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반한 화자는 소리의 출처를 쫓아 걷다가 연주의 주인공인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다음 날 아침, 기차에 오른 화자는 우연히 노인과 같은 객실을 쓰게 된다. 기차가 모스크바를 향해 달리는 동안, 간밤의 피아니스트는 화자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노인의 이름은 알렉세이 베르그다. 과거의 청년 베르그는 자신의 첫 연주회를 앞두고, 반동분자로 몰린 부모님이 집에서 체포되는 것을 목격한다. 베르그는 군의 위협을 피해 우크라이나의 외진 마을에 사는 이모 부부의 집으로 향한다. 건초 창고의 한 은닉처에서 몸을 숨기며 지내지만, 군인들은 이모의 집까지 들이닥친다. 잡힐 위기에 처하고 도피하기를 반복한 베르그는 결국 한 군인의 시체에서 그의 옷과 신분을 훔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을 버리고 죽은 몸처럼 살아가던 베르그는, 과거를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모든 시련이 시작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피아노를 연주한다. 결국에는 수용소에 잡혀갔지만, 베르그가 익명을 벗어 던지고 연주하는 장면은 오랜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빠져나온 설움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 카이스트 신문 발췌
러시아에서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마킨의 작품에는 스탈린 시대에 고통받은 영혼들에 대한 묘사가 가득하다. 마킨 특유의 섬세하고 세련된 문체는 고전적이라는 평을 받으며 톨스토이, 스탕달, 프루스트와 비견되기도 한다.
<어느 삶의 음악>의 저자 안드레이 마킨은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작가다. 그은 1957년 러시아 시베리아 출신으로 볼가 지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노브고로드 언어연구소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프랑스 유수의 문예지인 「마가진 리테레르」의 소련 특파원으로도 일했다. 그가 서른 살이던 1987년,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정치적 망명을 한 이후 1990년에 『어느 소련 영웅의 딸』이라는 제목의 처녀작을 출간하면서 작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한다.
1995년에는 『프랑스 유언』으로 공쿠르상과 고등학생들이 선정하는 공쿠르상, 그리고 메디치상까지 받는 3관왕의 주인공이 되면서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 유언』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화자는 작가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화자의 삶을 이중 분열적으로 몰고 갔던 매혹의 대상인 동시에 배척의 대상인 프랑스라는 유산은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작가 자신에게서도 드러난다.
마킨은 문학상 수상작 9편을 포함해 2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섬세하고 독특한 스타일의 작가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의 문체는 시적이고 세련되었다고 평가를 받는 한편 고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소련 영웅의 딸』 『올가 아르벨리나의 범죄』 『동구를 위한 레퀴엠』 『어떤 삶의 음악』 『작크 도름므의 하늘과 땅』 『기다리는 여인』 『영원히 기억될 짧은 사랑』 『사랑받는 여자』 『슈라이버 중위의 나라』 『또 다른 삶의 열도』 등이 있다.
마무리.
단절된 밤의 한복판 '나'는 '그'를 만났다. 오랜만에 감동적인 소설을 읽었다. 안드레이 마킨 작가는 처음이지만 반했다. '정말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계속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소설 읽고 여러 이야기 걸쳐서 말할 수 있지만 말하고 싶지가 않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그저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보고 싶다.
옮긴이 이창실은 '낮고 고귀한 영혼에 부치는 시(詩)'라고 표현했다. 꼭 제목으로 지어도 좋겠다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더 찬사를 보내고 싶다. 지금 단절된 밤의 한복판에 '나'는 '그'를 만났다. 작가는 꼭 그렇게 인도하듯이 그를 만나게 해주었나 싶었다.
소설을 읽을 때 책의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무대가 올려지고 장면 장면마다 영상이 흘러간다. 이 책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더욱 생생하게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어떤 소음도 이겨낼 수 있다. 안드레이 마킨의 책 속에서 경험하게 하는 무척 글을 잘 쓰는 작가였다. 그런 작가를 많이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