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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가지 Nov 28. 2022

24. 고맙고 고마워

아, 일상퀘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아, 일상퀘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노가지


24. 고맙고 고마워






"지원은 고등학교까지야. 대학교부터는 알아서 벌어서, 알아서 다녀"


엄마 입에서 늘 나오던 말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언론학과가 가고 싶다는 딸의 수시 지원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던 부모님. 당시 수시 원서의 지원비용은 7만 원에서 많게는 12만 원 정도 되는 비용이 들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음에 서울에 있는 대학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썼던 6곳의 수시 원서. 하지만 1차 수시도 2차 수시도 모두 낙방했던 나는 재수는 생각도 하기 싫다며 오로지 학과 하나를 보고는 대학에 진학했다.


"아무리 대학 이름이 있더라도, 중국어학과는 관심이 없는데요?"

"일단 유명한 대학을 가는 게 중요하지. 입학하고 나서 과를 바꾸면 되는 거야"

"선생님, 대학 4년이에요. 저는 제 4년을 그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등록금도 비싼데 원하는 걸 배우고 싶어요"


철이 빨리 들었던 걸까, 내 고집이 강했던 걸까. 나는 그렇게 속히 '돈지랄은 하고 싶지 않아요' 하는 마음으로 입시 담당 선생님들의 만류를 뒤로하고 한 지방대에 입학을 했다. 졸업하는 날까지도 선생님들은 내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재수 준비를 하면 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사회에 나오면 대학 타이틀이 정말 무시할 게 아니구나 느끼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닐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 상황을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올 거라고 했다.


선택의 갈림길을 마주할 때마다 나의 부모님은 항상 이렇게 이야기했다.


"원하는 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해. 모든 건 네 인생이니까."


이 말은 늘 나 자신에게 더 없는 자유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으로 돌아왔던 말이었다. 지방대를 가서 후회한 적이 있냐고 묻는 질문에 솔직이 '아니, 단 한 번도 없어'라고는 단언하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대학이란 새로운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배웠고 성장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대학은 알아서'라는 집안의 방침에 따라 2살 어린 남동생도 나도 방학기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개강 후엔 학교를 다니며 각자가 받은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갔다. 대학 4년, 총 8학기의 학자금 대출금은 수석입학에 과 2등 자리를 지켜가며 장학금을 받고 다녔음에도 예체대라는 이름 아래 2,800여만 원 정도가 되어 있었다. 대학을 다니는 중에 시작된 국가장학금 제도는 부모의 소득기준에 따라 지원자가 선발되었는데, 나는 번번이 탈락을 하는 통에 엄마 아빠의 직업이나 소득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나 몰래 숨겨 놓은 재산 있어? 우리집 잘 산다고 나 장학금 안 준대. 동기들 다 받는다는데 나는 왜 매번 탈락이야? 내가 부모 지원받아서 학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벌어서 내가 다니는데, 나는 가진 게 없는데 왜 안 줘?"

"그래? 왜 탈락이지?"


그런 생각을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본 것 같다. 내가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누리는 것들. 당연한 듯 받고 있는 보호는 계산에서 쏙 빠져있었다. 대학을 간 이후로는 부모가 내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고, 나는 부모에게서 받은 게 단 하나도 없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등록금을 감액받을 수 없다면 내는 돈의 가치를 모두 챙겨 먹겠다 하는 일념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공대 부전공을 신청해 학습량을 두 배로 늘렸다. 그 모든 것을 이어나가려고 하니 수면 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고 시간이 없어 밥을 못 먹는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그때 알았다. 


삼각김밥 두 개와 500ml 흰 우유 하나로 하루의 끼니를 겨우 해결하면서도 치열하고 즐거웠던 나의 대학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평가되는 사람이었음에도 스스로는 조금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달고 다니는 완벽주의 성향이었던 그때의 나. 하지만 경제관념은 없었으니 매월 자동이체되는 학자금 대출의 이자와 원금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이자가 아깝다거니 상환기간을 줄여야지 하는 계획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중도상환이 뭔지, 일시상환이 뭔지, 내가 설정한 대출기간이 얼마인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내 역시 배우려 하지 않았다. '매월 나가는 상환 금액만 연체되지 않고 잘 내면 되는 거 아닌가?' 할 뿐이었다. 취업 후에도 몇 년 간 상환금이 자동이체되는 날짜만 신경을 쓰다가 문득 친구들과 급여관리 비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 계기가 됐다.


"너네 월급에서 몇 퍼센트 저금하냐? 나 60% 저축하는데 잘 살고 있냐?"

"완벽하다. 나는 거의 식비로 나가는 중인데 저축 30만 원 빼면 다 소비다."

"나는 학자금 아직 나가고 저축 0원, 다 소비"

"학자금을 아직도 낸다고?"


내가 한국장학재단에서 처음 학자금 대출을 받았을 당시의 이자는 5.7%였다. 그다음 학기의 이자는 5.2%. 은행이자보다 비싼 이자였지만 당시엔 '내가 이 큰돈을 어디서 빌려서 학교를 다닐 거야. 학자금 대출을 써야지'하는 생각을 하며 의지했다. 그치만 몰랐다. 이런 방식으로 상환을 하면 마냥 이자만 내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친구들은 지금부터 여유자금이 생길 때마다 중도상환을 해서 학자금 대출금을 0원으로 만드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잡으라고 했다.


대학 4년, 취업 후 3년. 학자금 대출금을 내내 갚고 있던 7년 간의 자동이체가 중도상환을 마음을 먹은 3년이란 시간 동안 남은 2,200여 만원을 갚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마저도 먹고 놀고 하느라고 늦은 감이 있었지만 경제관념이 없던 내게 찾아온 큰 변화였다. 마지막 남은 학자금 대출금을 상환해 학자금 대출의 노예에서 해방되던 날, 친구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을 했다.


"학자금 대출은 천만 원 단위였지? 이제부턴 내 집 마련 대출이라는 이름이 너를 억대의 대출금 안에 가둘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그리고 그날 밤, 엄마는 집에 막 들어온 내 소리에 거실로 나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고생했네, 고맙고 고마워~"

"뭘, 노느냐고 늦은 건데"

"그래도, 혼자 다 해결했잖아. 고맙지"


고맙다는 별 거 아닌 그 말에 왜 그리 눈물이 핑 돌던지.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엄마의 마음이 전해지는 거 같아 코끝이 찡해졌다. 


학자금 대출의 노예 10년, 그 시간에 비로소 마침표를 찍은 내 자신을 응원했다.

아무쪼록 고생했다. 고생했다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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