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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가지 Dec 02. 2022

25. S전자와 어린이날

아, 일상퀘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아, 일상퀘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노가지


25. S전자와 어린이날







매년 어린이날이면 커다랗고 높아 보이는 담벼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주던 아빠의 회사. 어린이날을 맞은 꼬마들을 위해 그날 하루, 사내는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놀이공원처럼 변했고 곳곳에서 여러 행사와 게임이 진행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장에 온 어린이 누구에게라도 학용품 선물을 쥐어주던 당시 S전자의 어린이날은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내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날이다.


이미 양손 가득 크레파스가 들려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그만하라고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손이 모자라면 커다란 가방에 담아주기도 했고, 또 참여하고 싶으면 줄을 서서 차례만 지키면 되는 곳이었다. 실패해도, 탈락해도 다시 뒤로 가서 줄을 서고 도전하면 그만이었다. 얻지 못한다는 속상함이나 탈락의 쓴맛을 찾을 수 없던 곳. 그렇게 재미와 선물 모두를 품에 가득 안고 돌아오던 날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받아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어린이날이 지나고 나면 방안엔 여러 종류의 학용품이 쌓여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거의 없다. 내가 잠에서 깨면 이미 아빠는 출근을 한 상태였고, 내가 잠들기 전까지도 퇴근을 하지 못한 직장인이었다. 집에서 본 아빠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으나 어쩜 이렇게 단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기억나는 게 없다. 그럼에도 어릴 적의 나와, 젊은 날의 아빠 모습이 한 프레임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S전자의 어린이날은 1년에 단 하루였지만 내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어릴 적 앨범을 꺼내보면 자연농원이라고 적혀있는 마차나 꽃밭, 사자 그림이 있는 커다란 야구잠바를 입은 사진이 가장 많이 눈에 들어온다. 또 사진에는 없지만 어린이날만큼이나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볼링장의 컨피던스 맛이다. 동호회 내에서 닉네임 '거북이'로 불리던 아빠를 따라 볼링장에 갈 때면 아빠는 꼭 자판기에서 컨피던스를 뽑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톡 쏘는 음료 맛과 눈에 띄는 병 라벨에 지금도 한 번씩 컨피던스를 볼 때면 '오! 저거 아빠가 볼링장에서 뽑아주던 음료수야!' 하며 반가워하곤 한다. 옛 기억을 하나씩 짚어나가면 그제야 '아, 그런 날도 있었지!' 하며 떠오르는 추억들. 여유시간이 많지 않아도 당신이 가진 시간 내에서 많은 것들을 가족들과 함께 하려 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 살 두 살. 크레파스 선물에 좋아하던 꼬마가 크레파스를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내가 가진 미숙함을 잊었다. 부모 도움 없이 잘 큰 성인이 되었다고 착각했다. 얹혀살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것들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용돈벌이 하는 일 하나로 경제적인 독립을 이뤄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20대를 지나 30대에 접어드니 문득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됐다고 자만한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제 스스로 큰 게 아니라 아직도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크고 있을 뿐이었다. 


"집 나가면 다 돈인 거 아는데, 부모님이랑 같이 살 때 열심히 벌어 모아야 한다는데, 이렇게 의지만 하고 살다 간 세상 물정 모르고 마냥 엄마 아빠한테 기댈 거 같아"

"나와. 어차피 부모님이랑 같이 살든 안 살든 안 모이는 돈은 안 모여. 나와서 세상 무서운 걸 알아야 살 길을 찾지."


계기가 뭐였든 오래전부터 독립을 해 나와 살고 있는 친구들은 내가 요즘 느끼는 고민에 하나같이 '일단 나와서 1년을 버텨봐. 할 수 있는지 없는지'라는 답을 줬다. 당장 나가 살 집을 구하는 것, 보증금을 마련하는 것, 부동산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 짐을 옮겨 나가는 것 그 모든 것이 내겐 설렘이자 동시에 불안함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성장해야 했다. 누구도 나가라 등 떠밀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가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받은 거 없이 스스로 잘 컸다니. 바보 같은 생각이지. 나가서 혼자 살아봐야 정신 차리지.'


그렇게 서른둘, 나 스스로만 독립이라고 여기던 둥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이루고자 월세집을 구해 나왔다. '이게 네가 겪어야 하는 현실'이라며 나를 세상으로 밀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시작하기'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진짜 현실을 마주한 나 자신이 여기, 이 공간에 덩그러니 있었다. 그렇게 딱 두 달이 흘렀다.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안 모일 돈이랬잖아. 모이는 건 둘째치고 줄어들던데? 그나마 모아놨던 잔고가 너무 빨리 줄어드는데?"

"초반이라 그래. 없는 거 이것저것 사느냐고 더 그럴 거야"

"이게 현실이구나. 진짜 현실이구나. 전처럼 살다가는 나 1년도 못 버틸 거 같단 생각이 들어. 좀 심각하게 걱정이 되고 있어."


작은 집에서 내 한 몸 추스르는 것조차 대단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독립을 한 지 불과 두 달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제야 지난 30여 년 동안 딸린 식구들을 건사하느냐고 애쓰고 버텨낸 아빠의 무게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말에 집에 가 마주하는 아빠의 그 어깨가 한없이 작아 보였고 두 다리는 왜 그리 앙상하게만 보이는 건지, 왜 이제야 느끼게 된 걸까. 집을 나오기 직전까지도 '아빠가 해준 건 없다'라고 여기며 쌀쌀맞게 굴기만 하던 나였다. 그랬던 내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 아빠의 모습이 민들레 홀씨처럼 가냘 퍼 보이고, 당장이라도 날아갈 거 같은데도 단단히 자리 잡혀 있는 게 그리 대단해 보일 수 없었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의 무게'였구나 하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  


노래방을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노래를 부르러 가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선곡이었던 싸이의 '아버지'란 노래. 친구들이 노래를 열창하면서 울컥함이 차 오른다고 목이 메거나 우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왜 저래?' 하며 어리둥절해했다. 가사를 읽으면서도 내내 그랬다. 


'우리 아빠는 안 치열하게 살았는데' 

'처자식에 그렇게 헌신적이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왜 이 노래를 부를 때 눈물을 흘리는지, 부르면 울 거면서 왜 매번 이 노래를 선곡하는지, 노래가 끝나고도 여운이 가시질 않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아버지 존함을 그렇게 외쳐대는 건지, 어느 하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아버지 세 글자에 눈물을 삼키고 있다. 아니, 삼켜내지 못한 미안함을 입 밖으로 터트려낸다.    


'아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어찌 그렇게 사셨나요. 

더 이상 쓸쓸해하지 마요. 

이제 나와 같이 가요. 오오-. 

당신을 따라갈래요'.


싸이 - 아버지 가사 중 


정말 이제야 깨달았다. 어떻게 그렇게 버티며 지금까지 살아오셨는지 말이다. 

이제는 이 가사가 가슴 깊이 다가와 꽂힌다. 못되게만 군 지난 시간에 마음이 더 아려온다. 


아빠, 이제야 알아서 미안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잘할게. 건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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