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사리 베를린에 도착해 동네 구경을 한 바퀴 하고 들어왔다. 피로감에 몽롱하고 멍한 정신이었지만 베를린에 무사히 도착했으니 이제 진짜 꿈꾸던 여행이 시작될 것 같았다. 야경을 보러 나가기 전 잠시 허리를 펴기 위해 우리는 잠시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부스스 눈을 떠보니 피로가 싹 풀린 것처럼 개운한 느낌이 드는 것 보니 생각보다 많이 잔 모양이다 싶어 시계를 보니 다음날 점심이 되어 있었다.
"아..?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고?"
불과 12시간 전만 해도 이런 걸 생각하고 온 독일이 아니었다느니, 시작부터 계획이 다 틀어졌다느니 하는 이야기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던 나였는데 이젠 이런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베를린에 와서 하기로 했던 전망대나 투어 티켓이 모두 사용도 못한 채로 날아갔지만 아깝거나 아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독일어를 공부했다고 했고 유학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현지 소통이 원활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 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짐 하나 분실 없이, 어디 다치지 않고 무사히 베를린까지 왔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
여행정보 하나 없이 로망 하나 갖고 온 낯선 유럽 땅에서 누가 봐도 관광객처럼 보이는 차림으로 이른 점심을 먹겠다며 광장으로 나섰다. 광장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은 장애인 보호 서명운동이라며 기부를 강요하거나 서명판을 들이밀어 가린 채로 가방 속 소지품을 털어가는 집시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독일 좋아'를 외치며 패기 넘치게 날아온 20대 젊은이에게 닥친 또 한 번의 혼란. 정말 순진하게도 서명을 하기 위해 그들이 준 펜을 집어 드니 여행 경험이 많은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거 서명하면 돈 삥 뜯어가. 펜 종이 위로 꽂고 뭐라고 해도 무시해. 눈도 마주 치지 말고 저쪽으로 가자"
"아? 이거 사기야? 나쁜 애들이야?"
서명하려던 손을 멈추고 받침대 위로 펜을 내려놨다. 서명 좀 해달라고 생글생글 웃던 그녀가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 내 손을 붙잡으려 했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빠르게 뱉어냈다. 나는 하나 둘 모여드는 그 무리를 향해 '안 해! 안 한다고!'를 외치며 빠져나왔다.
"쟤네 처음엔 저렇게 웃으면서 서명해달라고 접근하고 안 해주면 욕하고 침 뱉고 파운데이션 뿌리고 난리 쳐. 아예 가까이 가지도 말고 눈도 안 마주치는 게 좋아."
"참나. 장애인 마크 있어서 착한 사람들인 줄 알았더니만!"
요란했던 베를린의 신고식이었다. 광장을 나와 돌아다니다가 테라스가 예쁜 한 피자집이 눈에 들어왔다. 고소하게 나는 화덕피자 냄새에 우리는 야외에 자리를 잡았고 메뉴판을 보며 구글 번역기로 무슨 재료가 들어간 건지를 하나하나 확인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아까 그 장애인 로고를 붙인 또 다른 집시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서명판을 바짝 들이밀길래 배운 대로 강경하게 'NO!' 하며 고개를 한 번만 딱 저으니 웬일로 순수하게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닌가. 식당이라 그런가 더 질척거리지 않고 그냥 가나보다 싶었다. 그때였다. 우리에게 메뉴판을 주고 갔던 서버가 그 집시를 쫓아가 붙잡았고 잠시 실랑이를 벌이더니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휴대폰을 하나 건넸다.
"미친?"
내가 구글 번역기로 메뉴판을 비추는 그 잠깐 동안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휴대폰이었다. 정말 순식간에 사라졌고 또 재빠르게 돌아왔는데 그 모든 과정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건네준 서버에게 연신 '당케 쉔 당케 쉔'하며 벌렁거리는 심장과 놀라움을 토로하기 바빴다. 유럽은 그런 곳이라고 했다. 한국처럼 테이블 위나 의자 뒤에 소지품을 걸어두거나 올려두는 그 순간 사라지는 곳. 가방 깊숙이 넣어둔 물건조차 덩그러니 열려있는 지퍼만 보게 되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독일에 도착해서부터 이틀 만에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을 보며 대체 여행 프로그램과 독일 다큐멘터리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건지에 대해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아니, 무서워서 뭐 하겠나 진짜. 그럼 밥 먹을 때 가방 꼭 쥐고 먹어야 해?"
"응, 그래야 해. 이제부터 진짜 긴장하자. 이게 현실이야. 너무 아무 생각 없었네."
가방을 앞으로 메고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곧 그 와중에도 주문한 피자가 나왔는데 한국에선 전혀 볼 수 없는 독특한 토핑이 피자 위에 올라가 짠내를 가득 풍기고 있었다. 생선 피자를 주문한 건가 싶었다. 정어리라고 했는데 생선만 하나 떼서 입에 넣으니 마치 천일염 한 숟가락을 입에 머문 느낌이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짠맛이었다. 정어리 토핑을 걷어내고 나니 한결 먹기가 편했다. 생선 피자라니 놀라운 조합이라며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우리의 여행은 이따금씩 로망이 피어올랐고 긴장이 풀릴 때쯤이면 정신이 반짝 차려질 만큼의 이벤트가 또다시 터지곤 했다.
베를린을 떠나 작은 소도시를 거쳐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뮌헨에 도착한 날. 기대했던 그곳은 생각보다는 삭막한 도시 었고 물가 비싼 여행지였으며, 그럼에도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펑펑 내리는 비에도 불꽃놀이를 보겠다고 고생을 사서 한 날이나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영국 정원만 빼면 말이다. 돌잡이 때 명주실을 잡은 애는 역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