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어쨌든 일단 파를 삽시다
소심한 O형, 손이 따뜻한 소음인, 그리고 집에서는 완전한 ENFJ이지만 사무실에서는 생존형 ISTP로 변신이 가능합니다.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잘 비벼진 양극의 성향들은 수시로 내란을 일으키곤 하는데 도전하느냐 혹은 포기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면 수많은 내적 갈등 후 결심에서 포기, 포기에서 질책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뒤숭숭한 심리상태가 되고 맙니다.
식재료 중 닭, 생선, 오징어 같이 크기가 작아 본디 모습을 잃지 않고 검은 봉투에 담겨 있는 것을 바라볼 때마다 뒤숭숭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훗날 알게 된 사실인데요, 재료 다듬기에 대한 두려움은 넓고 넓은 요리의 바다에서 단지 바닷물 한 바가지를 퍼 올린 모양새로 요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웠어요. 양념을 잘 다룬다는 것은 식재료 다듬기 다음으로 기초 과정이면서도 어쩌면 그게 다인 셈인데 천천히 이야기해볼게요.
장을 볼 때 항상 잊지 않고 남은 량을 확인하는 것이 있어요. 양파와 마늘, 대파인데요, 이중에 꼭 있어야 하는 양념을 고르라 하면 난 단연코 파입니다. 물론 마늘, 어디에나 들어가며 꼭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의외로 마늘이 빠진 음식보다 파가 빠진 음식이 더 티가 난답니다.
파는 쪽파와 중파, 대파가 있는데 쪽파는 김치를 담그거나 데쳐서 돌돌 말아 간장 양념 끼얹어 먹거나 전을 부쳐 먹어요. 중파와 대파는 어슷 썰거나, 듬성듬성 썰거나, 다져서 사용하고, 대개 불어 올려 끓여 먹는 찌개나, 찜, 국에 넣죠. 요리의 주재료가 아닌 양념으로 사용하려면 중파나 대파를 사는 게 유리해요. 쪽파에 비해 보관기간이 길고 국물 맛이 훨씬 훌륭하기 때문이에요.
"쪽파밖에 없어서요, 어쩌죠?" 그렇다면 상관없이 썰어서 넣고 끓이시면 되겠습니다.
대파를 살 때 다듬어지지 않은 것을 구매한다면 뿌리 부분만 잘라 깨끗이 씻은 후 냉동실에 넣었다가 맛국물(다시, dashi) 낼 때 넣어주죠, 알뜰해!
마른 겉잎 하나를 뿌리 쪽으로 죽 벗겨내면 매끈한 속이 드러나는데, 파의 초록색 끝부분이 말라있다면 톡톡 떼어 냅니다. 하얀 뿌리 부분 위쪽에서 잎이 갈라지는데 이곳은 땅에서 가까이 솟아오른 부분으로 흙이나 농약이 고여있을 수 있어요. 그 갈라진 부분을 중심으로 아래쪽을 자르고, 초록 잎 부분을 자른 후 분리해 씻어요. 키친타월을 바닥에 깔아주고 파를 통에 담아 보관합니다.
대파의 초록 부분은 길고 가늘게 채를 썰어 초장에 무쳐 양념 없이 구운 고기에 곁들여도 좋고, 삼겹살이라도 굽는 날에는 제 몸에서 나온 기름이 흥건할 때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어도 맛있죠. 국물요리 불 끄기 3초 전, 초록잎을 동글동글하게 송송 썰어 국물요리나 찜에 토핑(topping)으로 올린다면 완성도 100% 되겠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언제나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대파의 흰 부분을 끓고 있는 국, 찌개, 찜에 어슷 썰어 넣어주면 이미 냄비에서 꿇고 있는 주재료들의 불협화음을 일시에 종식시킬 수 있죠. 파의 흰 부분은 모든 유채색과 무채색이 뿜어내는 맛과 맛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 밀도를 높입니다. 익은 파의 들큼한 맛은 한치의 망설임이나 설레발 없이 음식의 주재료들을 온당히 수면 위로 들어 올려주며 특유의 향으로 콘트라베이스나 튜바가 되어 단단히 아랫부분을 지킵니다.
요리를 알지 못하는 어떤 이가 자연스럽게 냄비에 물을 담아 불을 켜고 봉지라면을 꺼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가 자신 있게 22리터 냉장고의 냉장실 문을 열었다고 하면 그곳에 마땅히 있어야 할 부재료 1가지가 무엇일까요? 단연코, 장담컨대 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이 끓든 안 끓든, 쪽파이든 대파이든, 혹은 중파이든, 칼이든 가위이든, 혹은 손으로 끊어넣든, 일단 조리과정 어디에나, 조리기구 무엇이나, 파의 종류 상관없이 파를 넣어야 합니다. 국물요리가 끓고 있다면 적어도, 반드시 파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요리를 잘하고 못하는 바로 그 경계에 파 한뿌리가 있었어요. 요리를 알지 못할 때 좀처럼 파에는 손이 가지 않았어요. 뭔가 거추장스럽고 거창해 보이는 데다 다 버리게 될 것 같아 사지 않았거든요. 집에서 라면만 끓여먹는다 하시는 분, 나아가 라면엔 계란만 있으면 된다 생각하시는 분도 장담컨대 파를 추천합니다. 다듬어져 소분된 것을 구매한 후 흰 부분, 초록 부분 상관없이 손으로 툭툭 뜯어 듬뿍 넣고 국물 라면을 끓여보세요.
라면에 파를 넣었을 뿐인데 절묘하고 풍부해진 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는 것, 이것은 넓고 넓은 요리의 바다에서 귀여운 돌고래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분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틀림없이.
이래도 안 사실 건가요,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