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전쟁 - 피할 수 없었던 전쟁
*제2차 전쟁의 일지는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과 <요사>의 기록이 서로 다른데, 여기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기준으로 작성하였습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제1차 전쟁이 끝난 이후 고려는 거란의 조공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송과의 관계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왕은 표면상 거란의 신하였으며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나, 성종의 다음 왕인 목종(穆宗)은 거란 몰래 송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였습니다.
한편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 본격적으로 중원으로의 남진을 시작했습니다. 999년부터 1003년까지 거란은 송의 국경지대를 공격하며 주도권을 잡았고, 1004년 가을에 거란을 다스리던 거란 성종의 어머니 승천태후는 20만 기병을 일으켜 송에 대한 전면전쟁을 벌였습니다. 거란은 전쟁에 앞서 고려에 송과의 전쟁 계획을 통보하며 고려가 함부로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게 차단하였습니다. 비록 고려가 표면상 거란의 신하였으나, 언제든 고려가 송과 손잡고 배후를 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거란-송 전쟁의 목적은 거란의 중원 내 영토인 연운16주의 방어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송의 관남 지방을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란군은 관남의 영주를 공격하여 2개월에 걸쳐 전투를 벌였으나 영주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거란군은 우회하여 송의 수도인 개봉으로 직공을 시작했습니다. 이 패턴은 이후의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거란군은 개봉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전연(澶淵)까지 진군하였습니다. 송나라에는 큰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거란군도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송의 수도를 위협하는 위치에서 송과의 협상을 통해 유리한 상태에서 전쟁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경은 현상 유지하고 송이 거란에 세폐를 바치며 양국의 황제가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전연의 맹’이 체결되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굴욕의 역사라고는 하나, 당시 송나라에게는 중화를 지킨 외교적 최선책이었습니다. 송이 거란에 보낸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의 세폐는 당시 송나라 1년 예산의 0.5%에도 미치지 않았다고 하며, 그마저도 거란과의 무역 흑자로 충분히 상쇄가 되었다고 합니다. 송 황제 진종은 처음에 세폐 총액이 300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과하다고 탄식하면서도 결국 수용하였는데, 알고보니 비단과 은을 합쳐 30만이란 것을 알게 되자 매우 기뻐했다고도 합니다.(윤영인, 10~11세기 거란의 중원 정책, 동양문화연구, 31권(2019), 107-135면)
전연의 맹으로 송과의 전쟁이 끝나자 이제 거란은 다시 고려를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려는 거란-송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1003년에는 송에 사신을 보내 거란을 견제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1005년에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전연의 맹을 축하하는 등 이중 외교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거란도 고려와 송의 잠재적 협력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고, 송과의 평화가 찾아온 지금은 고려가 가장 문제가 되는 위험요소였습니다.
1009년에는 고려와 거란 양국의 권력자가 모두 교체되었습니다. 고려에서는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顯宗)을 왕으로 세웠고, 거란에서는 승천태후가 세상을 떠나며 거란 성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거란 성종은 어머니인 승천태후의 그늘을 벗어나 이제 자신의 능력을 보여야 할 때였습니다. 게다가 거란 성종에게는 당시 아들이 없었고, 세력을 거느린 동생 야율융경은 성종에게 협조적이지 않고 언제든 제위를 노릴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거란 성종으로서는 정복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습니다(권용철, 거란 성종의 고려 친정 배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거란의 정세 분석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97호(2021), 1-25면).
때마침 거란에 좋은 명분이 되었던 것이 강조의 정변이었습니다. 형식상 고려 목종은 거란 황제가 책봉한 신하로서 고려를 다스리는 군주였으므로, 강조의 정변은 고려 군주를 시해한 반역이자 거란 황제에 대한 반역이기도 했습니다. 1010년 5월 거란 성종은 고려 정벌을 선언하고 8월에는 송에 사신을 보내 고려 정벌 계획을 알렸습니다.
고려는 전쟁이 다가왔음을 알았으나, 마지막까지 외교적인 노력을 하였습니다. 단지 순진하게 외교로 전쟁을 막고자 하는 의미만은 아니었고, 조공국으로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전쟁의 명분을 퇴색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는 1010년 8월, 9월, 10월에 연이어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10월에 거란은 사신을 보내어 이미 군사를 일으켰음을 통보하는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고려는 거란의 최종 선전포고가 있은 뒤인 11월에도 사신을 보냈습니다.
거란의 최종 선전포고가 있기 직전에 고려 역시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음력 10월 1일에 실권자 강조가 행영도통사가 되어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강조는 30만 군을 이끌고 통주 삼수채에 진을 치고 거란군을 맞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1010년 음력 11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11월 16일 거란의 40만 군대는 압록강변의 고려의 최전선 기지인 흥화진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흥화진은 이번 전쟁의 최대 영웅이 될 도순검사 양규와 흥화진사 정성, 부사 이수화 등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거란 성종은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 “너희가 강조를 체포하여 짐 앞으로 보내면 회군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처자식을 죽이겠다”며 협박하였습니다. 이수화가 정중한 문체로 항복을 거절하는 답신을 보내고,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서찰이 몇 차례 왕래하였습니다.
흥화진이 거란의 대군을 버텨내는 동안 강조의 군대도 거란군과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11월 17일 강조 본군의 통군사 최사위가 귀주 북쪽으로 진군해 거란군과 싸웠으나 패하였습니다. 흥화진은 굳건히 지키고 있었으나 고려 본군은 무너지는 것을 확인한 거란군은 흥화진을 포기하고 강조의 본군으로 향했습니다.
강조의 고려군과 거란군의 첫 전투에서 고려군은 거란의 기병에 대응하는 병기인 검차(劍車)를 앞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거란군은 물러났으나 이후 다시 선봉 야율분노와 야율적로가 삼수채의 고려군 보루로 침투해 왔습니다. <고려사> 강조 열전에 따르면 강조는 거란군이 침투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많이 들어오게 하라”며 안이하게 대응하였다가 다음 보고에서 거란군이 이미 진중에 대거 침입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당황하던 중 자신이 시해한 목종의 혼령을 보았다고 합니다. 강조는 목종에게 엎드려 빌다가 거란군에게 생포되어 거란 성종 앞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 급박하고 참담한 전투를 묘사한 와중에 강조가 혼령을 보았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참 어렵습니다. 이후 강조가 거란 성종의 회유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고려인으로서의 비장한 죽음을 택한 것과 연결하여 보면, 강조가 비록 반역자이긴 하지만 고려에 대한 충심이 있었고 스스로도 죄책감 또는 갈등을 느끼고 있었음을 은유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이 전투에서 강조 뿐 아니라 행영도통부사 이현운을 비롯한 지휘부가 함께 포로로 잡혔습니다. 거란 성종이 강조에게 신하가 될 것을 권유하자 강조는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천자(天子)를 자처하는 황제에게 ‘너’라고 부르며 완강히 거부한 것입니다. 반면 이현운은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일심으로 섬길 뿐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라며 투항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찼다고 합니다. 결국 이현운은 거란의 신하가 되고, 강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거란군은 기세를 몰아 곽주를 함락시키고 청천강을 넘어 12월 9일에는 서경(평양)까지 진군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숙주가 함락되는 등, 고려의 북방 방어선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서경의 지휘부는 거란에 항복하겠다는 표문을 보냈습니다. 이때 현종은 동북면에 있던 중랑장 지채문을 서경으로 보내 지원하도록 하였는데 지채문의 군대가 서경에 이르자 서경은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지채문은 서경이 항복하려 하는 것을 알고 성 북쪽에서 항복 표문을 들고 가던 거란 사신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죽이고 표문을 빼앗았습니다. 얼마 후 동북면의 사령관인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의 동북면 본군이 오자 지채문의 군대와 합쳐 서경으로 입성하였습니다.
이때 현종은 거란 진영에 사신을 보내어 조근(朝覲), 즉 왕이 거란 황제를 찾아뵐 것을 청하였습니다. 항복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거란 성종은 이를 허락하고 포로 노획과 노략질을 금지하는 한편, 개경을 다스릴 개성유수를 임명하여 기병 1천 명과 함께 내려보냈습니다. 고려를 다스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탁사정과 지채문의 군대가 이들을 공격하여 쫓아보냈습니다.
거란 성종은 자신이 고려의 지연 전략에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서경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탁사정과 지채문, 승려 법언(法言)이 9천 명의 군대로 서경 근처 임원역 남쪽에서 전투를 벌여 적군 3천 명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다음 날에도 지채문의 군대는 거란군을 이기고 이들을 추격하다가 마탄(馬灘)에서 적의 반격을 받고 크게 패하여 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아났습니다. 거란군의 유인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지채문의 패배로 그동안 잘 버텨오던 서경성은 위기에 놓였습니다. 탁사정은 발해유민 출신인 장군 대도수(요사 기록에는 발해타실)에게 “그대는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가 앞뒤로 협공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대도수가 이 작전 계획에 따라 서경 대동문으로 나갔는데, 탁사정은 서문으로 나가 그길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적에게 완전히 포위된 대도수는 결국 어찌할 도리 없이 거란군에 항복하였습니다. 이제 서경성에는 성 전체를 지휘할 장군이 없었습니다.
여담
목종 말년의 고려는 다음 왕위의 계승을 둘러싸고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목종은 자식이 없었던데다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 유행간 열전에 의하면 유행간이 생김새가 아름다웠으므로 목종이 유행간을 사랑해 ‘용양지총(龍陽之寵)’, 즉 왕이 남자를 사랑하는 관계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행간이 권세를 부리며 왕의 결정에 관여하고, 조정의 정상적인 보고, 지휘 체계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 역시 아찔한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추태후는 고려 5대 왕인 경종의 왕후였으나, 경종이 죽은 뒤 김치양이라는 사람과 통정하여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김치양도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使)라는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자기 사람들을 조정 요직 곳곳에 배치하였습니다.
목종은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속셈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종은 효자였으나 왕씨의 왕위를 김씨에게 물려주지는 않겠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 다음으로 가장 왕위계승권이 높았던 사촌인 대량원군 왕순을 불러 자신의 다음 왕위를 잇게 하는 한편,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의 군대를 불러 김치양과 천추태후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강조는 목종마저 폐위한 뒤 시해해버리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실권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실은 거란의 고려 침공의 최대 명분이 되었습니다.
강조가 반역을 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고려의 정치가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전쟁을 원하는 적에게 있어 상대방의 이와 같은 혼란과 분열은 너무나도 좋은 기회가 됩니다. 크게 보면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시점을 정한 것은 결국 고려의 분열이었습니다.
참고 자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요사>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역본
- 윤영인, 10~11세기 거란의 중원 정책, 동양문화연구, 31권(2019), 107-135면
- 권용철, 거란 성종의 고려 친정 배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거란의 정세 분석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97호(2021), 1-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