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란 단어

그냥은 성의 없지 않다.

by Roji

"이 그림은 왜 이렇게 그린에요? 그린 그림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그냥, 그냥 마음이 가는 데로 손이 그린 건데요."


약 10여 년 전 시각디자인과를 다닐 때 과제를 하면 항상 교수님은 그림에 대한 설명과 덧글을 원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릴 때면 크게 고민하며, 생각하고 그리지 않을 때가 많았었기에 그런 상황들을 매우 난처해했다. 한 번은 내가 그린 그림을 샘플로 다른 학생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나를 불러일으켰고, 나에게 설명을 요구했지만 그냥 마음이 가는 데로 그렸기에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교수님이 그림을 설명하셨고, 자신의 그림도 아닌 것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설명하는 모습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 강박관념처럼 그림을 그린 후 그 그림을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 다양한 미사여구를 사용해 글을 꾸며보기도 했지만 그림을 제대로 표현한 적은 없이 스트레스만 많이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빌리 엘리엇'라는 영화를 보았고, 영화 속 빌리는 춤출 때 아무 생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전 세계가 사랑하는 김연아 또한 스케이트를 탈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탄다고 했던 인터뷰를 보았다. 이렇게 나만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공식적인 매체를 통해 듣고 나니 강박관념을 떨쳐 버릴 수 있었고, 나는 지금도 그림을 그릴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린다. 그렇다고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대충, 성의 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정성껏 열의를 다해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린다.


이와 같은 상황을 겪으며, 그냥이라는 단어에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그냥'이란 단어는 성의 없고, 아무 의미가 담겨 있지 않는 말일까? 상황에 따라, 말투에 따라, 감정의 농도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단어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내가 왜 좋아?라는 질문에 구구 절절 키가 크고, 잘생기고, 돈을 잘 벌고, 착해서 등등 다양한 이유를 붙이는 것보다는 '그냥, 너라서 좋아' 이 한마디면 그 어떠한 이유보다 큰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 속에서 정확한 이유가 있지만 '그냥'이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함축시켜 그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오해가 쌓여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다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고, 긍정과 부정, 온탕과 냉탕이 존재한다.


그냥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성의 없고, 무관심한 느낌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래서 한번쯤은 나쁘지만은 않은 단어라는 것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오히려 부가설명 따위로 꾸밀 수 없을 만큼의 마음이 담길 수 있는 좋은 단어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도 그냥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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