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했던 일이 던져준 과제
살면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일들을 겪게 된다.
그것은 시련일 수도 축복일 수도 있다.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허탈한 순간이 오기도 하고, 내 몫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보상이 주어지기도 한다.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한 반가운 이를 만나는가 하면 매일 같이 보던 이와 갑작스레 이별하는 일이 생긴다. 한편 내가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돌아오지 않아 좌절하거나 나의 위치가 새삼 남들과 비교되어 안절부절하기도 못할 때도 있다. 공연히 구설수에 오르거나 뜻하지 않게 남에게 모함을 당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가진 기대 이상으로 좋거나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이다.
예상치 못했기에 더 기쁘게 맞이한 순간도 있지만 오히려 더욱 좌절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후자의 상황에서는 예상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모종의 아쉬움이 남는다. 또 저마다 경험한 사례는 달라도 맞이했을 때 썩 달갑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무진장 애를 쓴다고 세상만사가 언제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당하고야 마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또 예상한들 그마저도 빗나가고야 마는 것이 인생이다.
누구나 가슴에 세월이 남긴 몇 가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상처받는다는 것'은 겪을 당시에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건 물론이고 극복의 과정도 쉽지 않은 일이다. 몇 년 전 아들러 심리학에 조예가 깊은 어느 일본인 철학자가 쓴 책 ‘미움 받을 용기’가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참 시의적절한 위로의 말이었다. 그 몇 년 전까지만해도 자기계발서가 대유행이었던 시기다. 하지만 자기계발서는 노력하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한 없이 뒤처질 뿐이라는 말을 되풀이할 뿐, 상처를 치유하는 데 역부족이었다. 반면 제목만으로도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게 느껴졌던 ‘미움 받을 용기’는 수많은 상처받은 영혼들의 선택을 받았다. 상처받았음에도 그 서러운 감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지나쳐야 했던 사람들과 트라우마라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끝없는 경쟁 구도 속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무너져 내린 제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법은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냥 두면 낫겠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생존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배운 적은 있어도 줄곧 참아만 왔기 때문에 아픔을 대하는 법은 낯설다. 하지만 제 때 치료하지 못하면 상처가 자칫 곪아 터질 수도 있는만큼 시시때때로 내면의 어두운 감정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 그런 상황이 되었지는가에 대한 원인 분석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 상처는 자연히 아물게 된다. 찢기는 듯한 고통도 희미한 기억이 되어 사라지곤 한다. 새살이 돋는 것처럼 마음에도 상처를 뒤덮을 '용기'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괴롭게 한 문제가 나의 불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다.
단순히 남의 탓이나 환경 탓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텐데, 내 손으로 일을 망쳐버린 것이었다면 그보다 마음이 불편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마음은 제 잘못을 회피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문제의 원인이라면 다른 데 책임전가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내 탓이다'라는 자책은 이미 벌어진 상처를 더 찢어 놓는고 자괴감은 이미 아픔에 지친 사람을 슬픔의 수렁에 더 밀어넣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되뇌며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 있지만 결국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아야 극복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음 번엔 보다 현명한 답을 낼 수 있도록 내가 낸 오답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미 지나간 상황에 대해 끝없는 번뇌를 하기보다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폭풍은 이미 지나갔고 주변엔 부서진 잔해가 가득 널브러져 있는 상태가 됐으니 복구작업이 필요하다.
또 다시 모종의 '선택'을 받게 됐다.
종종 알고리즘 등의 선택을 받아 많은 이들에게 내 글을 소개할 기회가 생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 글을 공유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평소에 보는 이가 많지 않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브런치에 글을 남기곤 했다. 반듯하게 잘 된 작품을 선보여야 한다는 중압감이 덜 했기에 원하는 주제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많이 읽혔으면 하는 글들은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반면 대체 왜 관심이 쏟아지는지 알 수 없는 글이 선택을 받는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운 좋게 선택을 받은 글은 사람들이 가진 편견과 내가 가진 편견 그리고 그 둘의 부조화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보여지고 소비되는 이미지에 따라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줘야만 할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했던 내용이었다. 복잡미묘했던 심경이었던 만큼 어떻게 풀어낼지도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쓰는 도중 몇 번이나 내용을 다 뒤집어 엎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개가 매끄럽지 못했던 탓에 종국엔 하고 싶은 말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버렸다.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좀더 세심하게 다듬었어야 했다.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대한 회의감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항상 열정어린 모습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인데 꼭 매사에 사명감에 넘쳐야 할까. 갑질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오히려 내게 갑질하지 말라던 황당했던 지적에 대해 얘기하면 어떨까. 가끔 일 하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구석들이 눈에 거슬리는 게 당연하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한편 편하게 일하는 거 아니냐는 무지한 발언도 들은 기억이 있어 내용에 함께 버무렸다. 하지만 다수의 공감을 얻기엔 무리가 있었던 시답지 않은 하소연이었다.
예상치 못한 시련은 내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었다.
내가 하는 생각들이 사실 엄청난 편견으로 점철되어 있을 수 있다. 애써 중립과 객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있는 건 살면서 고민했던 흔적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단면만 보고 지나치는 이들에게 오해를 사기 쉽다. 사실 누구든 '오래 보아야, 자세히 보아야' 제대로 아는 법이지만, 그런 수고를 들이기에 서로는 바쁜 하루를 살아가는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생각을 나만의 것으로 숨겨두지 않고 세상에 내놓으려는 한, 꺼내놓을 말에 대해 보다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닿았다.
한편 나름대로 깊이 고민한 이야기가 남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더라도 날아드는 비판에 의연해져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다른 이들의 어떤 단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날카로운 모서리가 있다고 여기기로 했다. 완벽하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미움받을 용기를 더 강하게 키우기로 결심했다. 남들에게 미움 좀 받아도 마음 다치지 않고 괜찮을 수 있도록.
이전에 남긴 다른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적을 정도로 나는 깊이 고민해오고 있었다. 그만큼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에 대한 고민과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컸던 까닭이다.
때론 주변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생각을 표출하고 싶어했고 때론 간직해 온 유년시절의 특별한 일화를 소개하고자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나에겐 특별할 수 있지만 남들에게도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기에 뭘 말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 많아졌다.
한편 따뜻한 면도 차가운 면도 모두 내가 가진 일부인데 사람들이 보고 싶은 면과 다면적인 내 모습이 전부 일치하진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곁에서 나를 직접 보고 겪은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공감의 깊이도 다를 것이 분명했다. (중략) 그래서 내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난제다.
평소에 나는 불안하고 걱정 많은 자아를 지닌 몸이라 항시 신중함을 떨어뜨려 놓으려 하지 않지만, 이번엔 제대로 떨궜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악재만 있으랴, 미래엔 내가 알지 못하는 호재가 또 있을 수 있다 생각하며 앞으로 더 단단한 내공을 갖추어 나가겠다.
단단한 마음을 만들어 나가는데 연료가 될
'미움받을 용기'를 채워넣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