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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Feb 17. 2021

운수 좋은 날

울적한 하루에 대한 기록

지옥철, 아니 퇴근길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나는 추위를 피해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들 무리가 내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많이 추웠는지 오들오들 떨던 그들은 쉴새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극히 평범한 또래 간의 대화였음에도 여러 명이 한데 모여 재잘거리는 소리가 내겐 귀 따가운 소음으로 들렸다. 말 하는 족족 비속어가 섞여 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듣기 거북할 정도였다.




걸어서 지하철 역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엘리베이터를 자주 이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일상생활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는 엘리베이터는 소위 ‘시민의 발’이라고 하는 대중교통엔 설치된 수가 적고 사회 일부 구성원들의 전유물이란 딱지가 붙어 있다. 평소에 계단을 오르내릴 일이 많지 않아 엘리베이터에 눈길이 가건만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도 없을 때 슬쩍슬쩍 타곤하는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면서 괜히 무안해지기 일쑤다.


하지만 지하상가에서 지상의 지하철로 가는데 걷기를 택한다면 돌아가는 길이라 시간이 더 걸린다. 반면 엘리베이터를 타면 바로 지하철 역 위로 올라갈 수 있어 시간이 단축된다. 그래서 노약자만 타는 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많이 이용한다. 걷는 길이 상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이동 편의성이 없다시피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빠른 이동을 위해 그 떠들썩한 무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렸고 내리는 사람을 배려한답시고 한 쪽 벽에 붙어 있었다. 양쪽 가장자리에 사람이 있으면 중간 통로에 공간이 비고 그리로 통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한 자리였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한 한 노인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심기가 불편한듯 나를 쳐다봤다.


출처: 원더풀 마인드


지나갈 기미 없이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더니 급기야 지팡이로 나를 가리키곤 거기서 나오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자 이내 나를 거칠게 밀고 지나가며 왜 진로를 방해하고 섰냐며 성질을 부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일부러 제 앞 길을 막아섰다며 분을 토하며 사라진 그 노인의 거친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감히 내게 저런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저런 몰상식한 노인네.


통행에 방해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제멋대로 사람을 밀치고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되는가. 사람 대하기를 함부로 한 그 노인 때문에 평소보다 잔뜩 거칠어진 마음에 엄청난 풍랑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뒤 지하철에 오르고 나서도 달갑지 않은 사건을 맞았다. 빈 자리에 앉으려다 문 쪽으로 이동하는 사람과 부딪혀 휘청이고 만 것이다. 하지만 부딪힌 상대방은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돌아볼 생각을 못한 것인지 제 갈길을 향해 가버렸다. 밀려 넘어질 뻔한 나는 그저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뜬 낯선 이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것 외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연이은 사건에 마음이 잔뜩 상한 나는 곧 설움에 복받쳤다. 의지와 상관없이 붉어지는 눈시울을 애써 감추며 잠시 문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출처: 충북일보, 아침을 여는 시


오늘도 일하랴 숨가쁘게 흘러간 하루였다.


최근 들어 평소보다 배로 주어진 업무. 버겁다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불평 없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쏟아지는 업무량에 악소리 낼 법도 했지만 그런 내색할 겨를이 어디 있냐는 생각에 묵묵히 내 할 일에 열중했다. 힘들 때가 있으면 편할 때도 있는 거라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생각하며 일이 벅차 숨이 차오를 때에도 마음을 다잡았다.


밥값은 하고 살자’는 게 내 좌우명이었기에 어떤 어려운 일이든 씩씩하게 이겨내려고 노력해왔다. 사람들과 지낼 때에도 좋은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내 몫이라 여겼다. 그래서 체력이 닳아가면서도 나는 괜찮다며 밝게 웃었다. 그게 남들이 주로 보는 내 겉모습이다. 구태여 힘든 걸 내색하지 않고 불평불만을 안으로 삼키는 것. 솔직하게 힘들단 티를 내는 게 어색하고 불편한 게 내 디폴트 값이다.


그렇게 쌓여있던 업무가 마무리되어 갈 때 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팀에서 일부 인원을 차출해 급한 업무 처리에 투입한다는 거다. 나는 남게 되었지만 졸지에 떠난 자들의 몫을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하라면 하라는 대로 따르는 입장에서 왜 하필 내가 그 고통을 분담해야하느냐 따져 물을 수는 없는 법. 그렇게 갑자기 팀의 인원이 쪼그라들었고 남은 나에겐 잠시 부재할 이들의 몫이 추가로 주어졌다. 할일이 끊임없는 상황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일을 재분배했지만 결코 공평한 결과는 아니었다. 일찌감치 내 몫의 일감을 부지런히 처리해 온 나에겐 더 많은 부담이 주어졌고, 설렁설렁 일 하면서 제 때처리하지 못하고 제 일감을 쌓아온 사람에겐 더 적은 부담이 주어졌다. 대충 일하는 이에게 일감을 더 주었다간 감당이 안 될거라는 우려 때문이다. 인생에 완벽하게 공평한 순간은 거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언제나 힘들다. 문득 눈 앞에 닥친 현실이, 내게 잠시 더해진 시련이 유독 힘겹게 느껴졌다.


출처: 원더풀마인드


내 마음이 울렁이고 있을 때 그걸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많은 책임을 혼자 다 떠맡았나’ 하는 자괴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열심히 내 할 일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아니 그냥 대충 할 걸. 애써 남을 챙겨준다고 상대가 고마워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나서지 말 걸. 사람에게 잘해주느라 너무 마음 쓰고 후회하지 말 걸. 하는 그런 번민 속에 고통스러웠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등바등해온 것에 비해 받아든 인생 성적표는 왠지 모르게 초라해보였다. 성실하다고 항상 그 노력을 인정받는 것도 아니요, 고생한 보람을 누릴래도 기회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 또한 이미 쓰라린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다.


그렇게 다들 왁자지껄한 가운데 내 마음은 홀로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나를 위로하는 것 하나 없는 그 공간에서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주고받는 이들 틈에 섞여 즐거운듯 웃었지만, 그로부터 뒤돌아선 걸음에는 조용한 슬픔이 배어있었다. 삶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에 이입된 뒤로 자주 겪는 그런 고통스러운, 끊이지 않는 의문이다.


어떻게 사는 게 과연 정답인걸까?


끝내 삶의 해답을 찾지 못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나는 퇴근길 인파 틈에 섞여 들어갔다. 마음이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었지만 추위가 매서운 탓에 마냥 이리저리 떠돌 수가 없었다. 사무실에선 차마 내색하지 못했던 울적한 기분을 짊어지고 어서 집으로, 내 방 구석으로 피신하는 수밖에.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길조차도 순탄하지 못했던 오늘 하루, 운수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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