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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Mar 04. 2021

나의 작고 유치한 일기장

끄적이는 요즘의 일상

오랜 만에 일기를 쓴다.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어 볼품없이 먼지 쌓인 일기장을 꺼내 드는 밤이다. 오랜 만에 머뭇거리던 발걸음을 옮겨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먼지가 덮일 만큼 자주 손길이 닿지 않았지만 그 안에 새겨진 글에는 남모를 애정이 가득하다. 사실 일기엔 쓸데없는 기록들이 한가득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날 것의 생각과 감정들이 한 데 엉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잔뜩 날이 서 있기도, 한껏 기쁨에 고조된 감정을 표현하기도, 풀이 죽은 채로 서러움을 쏟아내기도 한 비밀스러운 공간. 바깥 세상에서 미처 위로받지 못했던 하루를 돌이켜보는 나만의 공간이다.


  남에게 보이는 글은 최소한의 생각거리를 던져줄 수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가 세운 철칙 때문에 소외되곤 했던 내 일상 속 잡다한 생각들. 그런 생각 꾸러미를 엮고 싶은 날이면 나는 일기를 쓴다. 내 일기장엔 가끔 꺼내 읽으면 그땐 그랬지 하며 빙그레 미소 지을 법한 소소한 이야기들로 써 내려간 그런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라질 고민들과 잠을 쫓아버린 걱정들 그리고 미처 토해내지 못한 기쁨과 슬픔으로 얼룩진 글들. 구성엔 기승전결이 부족하지만 참 다양한 것들이 담기곤 한다. 개 중엔 다수와 나누기에 부끄럽기도, 껄끄럽기도 한 내용도 있지만 ‘지금의 나’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글임이 분명하다.


출처 러닝스푼즈


  글 쓰는 데 혼을 불태웠던 지난 날들처럼 계속해서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쓰고 싶었지만 요즘 들어 쓰기가 쉽지 않았다. 호기롭게 써 내려갔던 미완성의 글을 붙잡고 여러 날 씨름했지만 결국 마무리를 포기했고 머릿 속에 구상만 해놓은 소재들도 잠정 폐기처분 했다. 사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었다. 빠른 속도로 하루에 여러 편씩 하고 싶은 말들을 맘껏 토해냈던 지난 겨울. 너무 잡다하게 많이 썼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무렵, 나는 미래의 어느 날 주춤해 있을 나를 떠올리며 쓰겠단 욕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 때 그 순간의 욕망에 충실해야만 후회가 없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나는 잠시 느린 속도로 걷는 시기를 맞았다. 좀 더 내 주변 풍경을 찬찬히 바라보아야 하는 때다. 어쩌면 도약의 시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 속엔 뚜렷한 계획이 서지 않았던 반면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손에 잡히지 않는 마음을 토로할 공간을 찾아 나섰다. 그 가운데 일기는 마음을 달래고 기록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이라 여겨 나는 어설프나마 내 어제와 오늘의 기록을 남긴다.


photo by. Rojoy


알 수 없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요 며칠 동안 이유를 알 수 없이 온 몸에 힘이 쭉 빠진 채로 지냈다. 계획했던 일들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을 읽으려 했고, 좀더 다정하게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물으려 했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볼까 했는데, 어떠한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기사도 찾아보고 다른 여러 글을 읽었지만 글을 쓰면서 자꾸 방향을 잃었다. 생각이 한데 모이지 않고 끊임없이 흩어졌다. 결론은 지어지지 않는데 그냥 뭔가를 의미없이 끄적이고 있었다. 머릿 속에 들어오는 어떤 것도 깊이 자리잡지 못하고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몸도 말썽이었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음에도 부족한 것인지 구석구석 찌뿌듯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루종일을 어찌어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힘이 쭉 빠진 채로 멍한 기분이었다. 사실 하루를 돌이켜보면 참 무난하게 흘러갔다. 쌓여있던 업무도 잘 끝냈고 중간중간 책도 조금 읽었고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많이도 웃었던 게 분명 기억난다. 다만 마치 그게 꿈이었던 것처럼 멀게 느껴진다. 정말 알 수 없는 기분이다. 전에는 그 날 하루를 곱씹어 보며 기록할 만한 걸 생각하기도 했고 감정을 정리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하루 끝에 남아 있는 기억 자체가 희미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느끼는 기분도 달라졌다. 대체로 불쾌한 감정이 강하게 들곤 했던 아침이었다. 눈 뜨고 정신 차리기 바쁜 탓에 기분 좋을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바람의 온도가 따뜻해져서 일까, 아니면 모든 것이 새로 시작하는 3월이 왔기 때문인걸까. 쓸데없는 걱정에 휩싸이지 않는, 왠지 모를 설렘이 가득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알 수 없는 희망이 가득한 하루의 시작. 어떤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익숙한 출근길과 퇴근길을 오가는 일상일 뿐인데도 색다른 기분이 든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문득 생각해 보면 작년 3월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여전히 코로나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전하는 일상이 아예 멈추진 않았다. 겨우내 한산했던 지하철에도 재잘거리는 학생들로 가득 찼다. 이제 사람들은 당연한듯 마스크를 끼고 거리를 활보한다. 폭증한 수요에 비해 마스크 공급이 부족해 약국마다 줄 서던 풍경도 벌써 1년 전의 일이 됐다. 그래서인지 거리엔 긴장이나 우울함보단 활기찬 분위기가 더 감도는 것 같다.



주목받는 일에 관심이 크게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욱하는 성질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지만 나는 이전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다. 주목받는 데 스스럼이 없었던 예전엔 내 몫의 관심이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 게 부담스럽고 내 이름이 어떤 이유로든 오르내리는 게 불편하게 느껴진다. 조용히 관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 뒤로는 많은 욕심을 내려놨다. 아등바등하지 않으련다, 하는 다짐을 하게 됐다. 관심 좀 받는다고 해서 지금의 인생이 크게 달라지랴. 벼락같은 행운이 따르지 않는 한, 무수한 작은 결실이 모여야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무리하게 탐하지 않기로 했다. 무모한 행동은 탐욕이 낳은 결과물일 테니 말이다.


낯선 선택이 새로운 길을 만든다.


  나는 종종 새로운 시도를 하고도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늘 뒷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 결정이 합리적이었는가를 의심해보고 과연 미래에 기대할 만한 결과를 낼 수 있을지를 가늠해본다. 하지만 좋아서 시작한 일에 그런 철두철미한 계획 따위는 대개 없었다. ‘그냥’이란 이유로 나선 행동에 뒤늦게 이러저러한 잣대를 들이댄들 의미있는 결론이 지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새로운 관점을 가지는 것과 새로운 생각이 들어서는 데는 큰 도움이 됐다. 몰랐더라면 들지 않았을 생각이 들었고 해보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 선택 또한 없었을 것이었는데 굳이 선택지를 비틀면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


  피부 고민 때문에 천연제품 만들기에 관심을 실컷 들인 뒤에야 기성 화장품의 허와 실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고, 남들 좇아 주식 몇 주 사봤다가 된통 마이너스를 당한 뒤에야 재테크 공부에 눈을 뜨게 됐다. 오랫 동안 생각만 해오던 춤을 한두번 배워본 뒤에야 비로소 가장 맞는 취미생활이란 걸 깨달았고, 오랜 만에 다시 시작했던 피아노를 배우며 내가 끈기를 가지고 임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 않던 이면의 것들은 직접 부딪혀 봐야만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한 삶의 교훈들이 많이 남아있다. 아직도 수없이 많은 경험들에 부딪혀 가며 배우고 있다.


출처 한의신문


생각보다 무난한 것 이상으로 잘 살고 있다.


  요즘 무념무상으로 주어진 것들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사람들과도 별 탈 없이 잘 지낸다. 약간의 특이사항이 있다면 피부가 트러블로 뒤집어진 뒤로 피부과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병원을 오가는 일상은 번거롭기 그지 없다. 원인 미상의 여드름이 얼굴을 뒤덮은 바람에 외모에 빛을 발할 새도 없이 속상함이 더해가고 있다. 어릴 땐 아무런 증상도 없었건만 나이가 들어서 비로소 시작된 트러블 증상 때문에 맘껏 치장하기도 힘든 내 젊은 날이 흘러가고 있다.


  따스함이 온몸에 스미는 낮 동안 많이 웃고 떠들고 즐겁게 지내고 있지만 어둠이 찾아오면 나는 다시 암흑같은 고요함 속으로 빠져든다. 알 수 없는 행선지로 잠시 떠나는 것만 같다. 물론 일상의 무료함 대신 멍함으로 가득한 요즘이지만,  하늘엔 여전히 별이 빛난다. 아스라이  곳에서도 찬란하게 빛이 난다.  별을 바라보며 나는 희망을 쥐고 있다. 끝내 놓지 못한 이 마지막 보루가 나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질 그 무엇이 되리라. 내일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겠지만, 그런 하루가 또 무사히 저물기를 바라고 있다.


비비디 바비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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