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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Apr 24. 2021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법

잘못을 마주해야 나아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

요즘은 태블릿 PC로 공부하는 게 대세다.


  지금은 학생들이 대부분 태블릿 PC로 인터넷 강의를 수강하고 노트필기를 한다. 어릴 때부터 책에 노트필기하는 게 더 익숙해 전자기기에 필기한다는 개념 자체가 낯선 나와는 달리 지금의 10-20대에겐 익숙한 일상품이 된 것 같다. 대학가 근처 카페를 들르면 앳된 얼굴의 대학생들이 태블릿 PC를 이용해 강의를 듣거나 과제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책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 아이패드 하나 들고 다니는 게 훨씬 가볍고 다용도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효율적이라는 게 큰 장점이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태블릿 PC 없었다. 스마트폰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처음 등장했고 인터넷 강의는 PMP라는 전자기기를 이용해 들었다. PC처럼 사용할  없었지만 그럭저럭 휴대하고 다니며 강의를 들을 만했다. 대학생  남들처럼 무거운 전공 서적을 들고 다녔다. 벽돌 무게와 견줄 만큼 무거운 책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무게만큼  값도 비쌌다. 졸업   년이 지난 지금은  곁에 남아 있는 전공책들이 거의 없지만 아직도 무거운 전공책을 끼고 등하교했던 기억은 선명하다.


  공무원 수험 생활을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책을 싸들고 다녔다. 개념서와 문제집을 잔뜩 짊어지고 노량진과 집을 오갔다. 과목 당 사야하는 책이 참 많았다. 개념서도 보통 2권 이상으로 되어 있어 두께가 꽤 됐는데다가 내용이 요약 정리되어 있어 암기와 복습에 유용한 필기노트, 기출문제집과 예상 문제를 수록한 동형 모의고사까지. 그 때문에 아무래도 굽은 어깨가 무거운 책가방 때문에 더욱 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어떻게 그 무거운 것들을 들고 다녔다 싶다. 수험생 꼬리표을 뗀 후로는 가능한 한 짐을 줄였다. 가방이 무거워지면 마음이 무거웠던 시절이 떠올랐던 탓이다.


  하지만 다시 수험생활을 시작하며 이번엔 나도 다른 공부하는 이들처럼 아이패드로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  원래 공부할 목적으로 산 게 아니라 쿠팡의 48개월 무이자라는 상술에 휘둘렸던 데다가 동영상 편집을 전문적으로 배워보겠단 결심 때문이었다. 새로운 취미 생활을 찾아보리란 생각으로 마련한 장비가 공부에 유용하게 쓰일 줄은 미처 몰랐다. 어쨌든 아이패드를 사용하게 되면서 가장 불편했던 건 종이책이었다. 들고 다니기 싫어 전자 형태의 파일이 필요했지만 대부분의 책들이 특히 수험서들의 경우 무단 복제 등을 우려해 e-book 형태로 출간하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게 셀프 스캔을 할 수 있는 업체였다.



https://medium.com/


첫 방문했을 때는 최악의 순간을 맞았다.


  공부할 마음을 먹고 책을 주문하자마자 바로 스캔 업체를 물색했다. 인터넷에서 신뢰할 수 있을 만한 후기를 뒤진 끝에 신촌에 있는 한 스캔 업체를 찾았다. 하지만 관련법에 따라 제3자가 스캔을 하게 되면 불법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어 스캔은 셀프로 진행해야 했다. 도움 없이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여러 후기에선 전혀 어렵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예약을 하고 길을 떠난 그 날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마침 그 날 홍대 인근에서 첫 보컬레슨 수업이 예약이 되어 있어서 수업 1시간 전으로 예약해 두고 업체에 방문했다.


  그런데 그 날 예약자 명단엔 내 이름이 없었다. 다음날로 날짜가 잘못 예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황당했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럴 수 있다 생각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스캔할 수 있는 자리는 2개. 업체는 인당 기본 30분씩 시간을 쓰는 걸 전제로 예약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그 날 따라 기다리는 사람은 많았고 남들보다 배로 시간을 쓰고 있는 고객이 있었다는 것이다. 2시간이 다 되도록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 때문에 더욱 뒤의 예약 스케줄이 밀려 있었고 나는 수업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루 스케줄을 세우며 계획이 틀어지게 될 거란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게 꼬여갔다. 스캔도 해야하고 수업도 가야하는데 나는 여전히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약했던 시간이 45분이나 지나서야 겨우 스캔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일과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계획형 인간인 내겐 혹독했던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나 역시 여유있게 다음 스케줄을 잡기보다 딱 맞추려 했던 터라 돌발 상황에 대응하지 못했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운마저 따라 주지 않았다.


  결국 다 하다말고 헐레벌떡 수업 장소로 이동했다. 신촌에서 홍대부근까지 이동하려면 거리가 꽤 되었기에 탈 것을 이용해야해서 택시를 잡았는데 그 날 따라 공사로 인해 차량정체가 심했다.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는데 시간은 흘렀고 나는 택시 안에 멈춰 있었다. 수업 후에 다시 오기로 맘 먹고 그나마 서둘러 출발했지만 일찍 도착하지도 못하고 30분 가까이 지각을 하고야 말았다. 도착할 즈음엔 첫 수업에 대한 설렘과 긴장이 사라져 버렸고 하루가 엉망이 되버린 데 대한 옅은 분노만 남아 있었다.


출처 인살롱(https://hr.wanted.co.kr/)


  여차저차 반쪽짜리 수업이 끝난  다시 스캔 업체로 돌아갔다. 좀 전에 봤던 사장님과 아르바이트생  명이서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먹을 새도 없이 바빴다. 아까 배달 왔던 피자는 먹는  없이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들도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듯 했다.   시간  가게를 나설 때만 해도 잔뜩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는데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직원들은 짜증   내지 않고 특유의 친절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끼니도 거른 채로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사장님에게 손님이 많아 힘드시겠다고 말을 건네니 대번 죄송하단 말을 했다. 그는 예상치 못하게 문제가 생겼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침착하게 꺼냈다. 내심 그의 말에 놀랐지만 밝게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였다면 저렇게 몸이 지치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상황설명을 하고 사과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별 말 없이 돌아섰지만 집에 도착하고 나니 문득 그래도 한 마디하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어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스캔 자리가 부족했던 점, 주말에 상주 직원이 얼마 없었던 점 등등 시스템적으로 보완할 부분이 보였다고 말이다. 괜한 오지랖으로 여길 수 있었겠지만 그런 불만 사항에 대해서도 업체 사장님은 다시 한 번 죄송하다며 앞으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답변을 남겼다. 그 세심한 답변에 남아있던 불만이 말끔히 사라졌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https://services.blog.gov.uk/


한 달 만에 이전에 방문했던 스캔업체를 다시 방문했다.


   뭔가 달라져 있을 거란 기대를 크게 하진 않았는데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사장님을 제외한 직원은 총 3명으로 늘어있었고 스캐너도 1대 더 추가되어 있었다. 손님 간 예약 간격도 여유있게 배치하는듯 했다. 오히려 또 사람이 많아 밀려있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라서 깜짝 놀랐다. 내가 처음 방문했던 그 날처럼 여러 손님들이 장시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여유가 생긴 직원들은 더욱 친절했고 덕분에 여유있게 볼 일을 마치고 나올 수 있었다.


  재방문을 하면 할수록 서비스의 질이 나아진단 생각이 드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특히 처음에 불쾌한 일을 겪은 다음 방문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더 나은 처우가 기대되지 않는 경우 더 그렇다. 한 마디로 상대가 믿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깨고 고객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고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 점은 무척 놀라웠다. 별 말 없이 간단히 인사하고 나왔지만 여전히 친절한 그의 모습 역시 인상적이었다. 달라진 사업장 풍경이 지난 그의 말이 진심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는 힘은 반성에 있다.


그 분명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하루였다. 그렇게 한껏 좋아진 기분으로 조용히 감사한 마음을 남긴 채로 가게를 나왔다.

 




https://www.newscient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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