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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May 19. 2021

반 잔의 물컵

마음먹기 달린 것들에 대하여

내 컵엔 물이 반 정도 담겨 있다.


  채워진 물의 양은 시간이 흘러도 거의 변함이 없었지만 그걸 바라보는 나는 시시때때로 변했다. 어느 날은 내 물컵을 바라보며 이제껏 이만큼이나 채웠노라며 기뻐했고 또 앞으로 채울 물의 양을 계산하며 행복해했다. 그런데 또 다른 날엔 남들에 비해 얼마 채우지 못한 게 아닌가 싶어 전전긍긍했고 변함없이 투박한 컵 모양에 시무룩하기도 했다. 모르는 사이 남들의 물컵은 화려한 문양과 빛나는 색깔로 덮여 있었다. 누군가 요술이라도 부린 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여러 번 남의 것을 들여다 보았지만 눈부신 그 찬란함에 마음이 답답해질 뿐이었다.


   어릴 땐 컵의 물을 엎지르지 않고 다 채우기만 하면 성공이라 믿었다. 그래서 물을 조금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가끔 실수로 물 잔을 엎질렀다. 겨우 힘들게 모인 물이 손 쓸 틈도 없이 바닥으로 흐르는 걸 바라보며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시 채울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 동안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 낙담하기보단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더 강했기에, 나는 조금씩 한 잔의 물컵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실수로 채우던 양이 사라져도 다시 채우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물잔을 애지중지 아끼며 살아온 나날이었다.


출처 Pixabay


  여태껏 내 물컵에 신경을 쏟느라 바빴을 땐 보이지 않았던 남의 컵들이 어느 순간 보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탈로 장식된 잔이나 황금빛이 감도는 잔들을 바라보며 결코 서로가 같은 물잔을 가진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물을 채우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쁨에 겨웠던 때가 있었는데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또 어떤 이들은 나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이 채워넣은 상태였다. 그걸 알고 난 뒤 내 물잔을 다시 바라보니 공연히 씁쓸함이 몰려왔다. 나는 이 물잔을 다시 사랑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돌연 물잔을 깨트려 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마음이 산산조각 나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반 잔은 내게 너무 소중한 것이었다. 그 반 잔의 물컵은 내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 눈엔 평범한 반컵에 불과한 것일 테지만 내게는 삶의 전부를 쏟아낸 것이었다. 때론 웃음과 희망을 채워넣었고 절망과 슬픔의 눈물도 들어있었다. 노력의 땀방울까지 최선을 다해 쏟아부었던 흔적이 어려있다. 그런 소중한 것을 내 손으로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그 안에 담긴 행복했던 기억들마저 전부 지워버릴 순 없었다. 


한 방울조차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나의 삶이자 희망이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앞서 나가는데 과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급함은 내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평판에 흠이 갈까 전전긍긍했고, 남들과 잘 어울려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 상심했었다. 또 '적당히'의 선을 지킬줄 몰랐던 나는 뭐든 최선을 다했다. 열정은 나에게 있어 미덕이었다. 그래서 한 동안 모든 이들에게 칭찬받는 아이였다. 나는 나의 노력이 성공적이었다고 믿어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처음이었으니깐 잘 보이고 싶고, 잘 하고 싶고, 모든 게 문제없기를 바랐지만 그건 내 크나큰 욕심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내가 어떤 위치로 옮겨지더라도 그건 내가 따라야하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쓸데없이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내 노력의 가치가 의미 없다 느껴질 때마다 애써 나는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의 순간이라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현재에 대한 불안감은 몸과 마음을 나날이 지치게 만들었다. 즉 나는 하루라도 빨리 내 물잔을 다 채우려고 너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https://matthew.kr/%EC%A1%B0%EA%B8%89%ED%95%A8/


그런데 내게는 이미 가진 반 잔의 물이 있었다. 


  어느 누군가와는 깊은 유대감을 갖지 못했더라도 종종 연락하고 만나서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으며 시시덕거리는 동기나 친구들이 있었다. 업무 스트레스가 과다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일거리 걱정도 적고 여유마저 있는 것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 물잔을 다 채우지 못했다며 조급해한 내 자신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의 물잔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나만의 속도를 놓치고 만 것이다. 제아무리 빠르게 결승선에 도착하려고 무리한들 내가 남들에 준하는 속도로 달릴 수는 없다. 오히려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해야 끝까지 갈 수 있다. 그래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돌아보지 못하고 남들의 것과 비교하느라 얼마 간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비교가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매 순간마다 긴장감을 높이고 스스로에 대한 자제력을 잃었을 뿐, 상처뿐인 경쟁이었다. 여전히 내게는 조금씩 더 채워지고 덜어지는 반 잔의 물컵이 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채워온 이 잔에 앞으로 또다른 기쁨과 행복이 많이 담기길 바라며 조금씩 조금씩 또 채워나갈 것이다. 또 바람이 스쳐 컵 안의 물이 요동을 치고 실수로 컵을 넘어뜨리더라도 물을 채우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다 채워질 그 날을 반드시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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