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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Aug 08. 2021

무지개가 뜬 풍경

창가에 앉아 공부를 하는 소녀

오늘도 창가 자리에 앉았다.


  온종일 한 자리에 붙박혀 있어야 하는 하루. 스스로 결정한 것이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삶은 역시 녹록지 않다. 전보다 체력이 더 떨어진 탓에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자꾸 눈이 감기기 일쑤다. 그렇게 몸이 휘청이고 마음이 허공에 붕 뜨는 순간 나는 지난 날의 우울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보잘것 없는 내 위치, 크게 달라지지 않을 암울한 미래. 아, 나는 지금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숨 막힐 것 같은 현재에서 나는 도망쳐야만 한다.


그게 내가 선택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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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답한 심정을 달랠 때 도움이 되는 건 역시 푸른빛 하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창가 자리에 앉는다. 은은한 조명만이 감도는 어둑한 스터디 카페 안. 블라인드를 살짝 걷어 올리면 밝은 빛이 쏟아진다. 눈부신 광명을 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본격적으로 고개를 아래로 파묻고 해야할 일에 집중하기 전 잠시 하늘을 바라본다. 지금 일과 사람에 모두 지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 바로 조용한 공간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주중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편안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나 혼자만 갖는 평온한 시간이기에.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하늘 보는 걸 좋아했다. 구름이 둥둥 떠 있는 맑은 하늘을 볼 때면 얼마나 기분이 상쾌해지던지. 그래서 나는 어떤 초능력을 갖고 싶으냐 물을 때마다 하늘을 나는 능력을 갖고 싶다 했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시름 하나 없어 보이는 저 높은 곳이 좋아 보였던 거다.


  그래서 비행기도 너무 타고 싶었고 높이 나는 기구 같은 것도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 하늘 위에 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죽일 것 같아서. 그렇게 아래를 내려다 보는 건 더 짜릿할 것 같아서. 그런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게 참 좋았다. 밤이고 낮이고 하늘은 내게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여러 색으로 물든 모습도 까만색으로 물든 공간에 총총히 빛나는 별들도 너무 좋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래서 나는 창가 자리를 좋아한다. 시야에 바깥 풍경이 들어오지 않으면 무지 답답하게 느껴진다. 앞뒤가 꽉 막힌 사무실이 특히 그렇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햇빛이 싫다며 블라인드를 내리고 바깥 경치와 단절된 삶을 살지만, 그런 공간에 나는 갇혀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학창시절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창가 자리를 선호해 왔다. 좀 덥고 추워도 그와 상관없이 햇빛이 들고 경치가 보이는 창가 자리가 좋았다. 풍경에 심취해 남몰래 잠시 멍 때릴 수 있는 그 공간에서 나는 달콤한 휴식과 같은 순간을 즐겼다. 그 풍경이 비록 회색빛에 불과했을지라도 창문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오늘도 하늘을 바라봤다.


  늘 그렇듯 창가 자리에 앉아 짐을 풀었다. 집합제한 4단계로 영업시간 제한 때문에 스터디카페에 오래 있을 수 없어 빠르게 공부를 마쳐야했다. 후다닥 물을 한 컵 떠 온 뒤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블라인드를 올렸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일몰 시간의 주홍빛 하늘.


  그런데 낯선 게 눈에 들어왔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눈에 담은 적 없었던 것. 늘 사진으로만 만났던 기상현상. 저 멀리 무지개가 떠 있었다. 아주 크고 선명한 무지개였다. 그러니까, 방금 창문으로 마주한 건 엄청나게 쏟아지던 비가 막 그친 다음의 하늘이었다. 그 하늘에 일곱 빛의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달려 나갔지만 1층 높이에선 저 하늘 높이 뜬 무지개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무지개를 어떻게든 카메라에 담으려 애를 썼다. 공부를 위한 조용한 공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끓어오르는 흥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생애 첫 무지개였다. 상상했던 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만 같았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굵고 선명한 색이었다. 민폐가 된다는 걸 알았지만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너무 방해될까 싶어 욕심만큼 찍지 못하고 말았다. 사진을 다 찍고 나서 한 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토록 선명하게 피어났던 무지개가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잠시 설렜던 순간이 순식간에 지나고 있었다.


photo by. Rojoy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어 무지개가 떴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마음 속으로는 이미 여러번 ‘모두 창 밖을 보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15분 쯤 지나니 희미한 흔적만이 하늘에 남아 있었다. 오늘도 창가 자리에 앉길 잘했구나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나 역시 아이패드로 눈을 돌렸다. 오늘의 할 일을 끝내야 내일을 맞이할 수 있으니깐. 내일의 나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야지.


그렇게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오늘도 나는 책과의 씨름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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