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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Jan 12. 2022

나라는 상품의 가치

데이팅앱 사용 후기

성별, 이름, 나이, 거주지, 키, 체형, 혈액형, 음주 스타일, 흡연 여부


  어플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정보를 채워넣어야 하는 수고가 따른다.


참 나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다.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사이에 이런 개인정보들을 나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곱씹으면서도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무리 ‘자만추’가 좋다고 하지만, 코로나 때문인지 이미 채갈 놈들 다 채 가서 그런지 이런 인위적인 기회 없이는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핍은 욕망을 부추기는 법이다.

  

   칸을 채우다가 문득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기도 하고, 무슨 취미가 있었는지를 고민해보기도 한다.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좋은 평가를 받을  있을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하나씩 작성해 나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온 사진을 고르는 일이다.


  가장 크게 보여지고 쉽게 평가받을 것은 나의 외형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찍은 사진은 죄다 마스크를 썼다. 어쩔  없이 스크롤을 한참 올려서  개월  사진을 고른다. 그래도  때의 나는  미소도 예쁘고 괜찮아 보인다. 지금의 내게 묻어있는 삶의 찌꺼기는 부득불 알게 되기 전까진 애써 감추고 싶은 민낯이다.


  어릴 때는 하루에 몇 번씩 셀카를 찍는 게 일상이었는데, 나이들고 나서는 좀처럼 셀카를 찍지 않게 됐다. 화장을 하지 않은 날엔 누가 찍어준대도 손사래를 친다. 얼굴을 뭐로든 가려야 사진 찍을 용기가 비로소 난다. 주름이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얼굴에 생기가 돌지 않는 탓이다. 이제는 필터가 씌워진 어플이 아니고서야 셀카를 찍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어느 각도로 찍든 잘 나온 것 같지가 않은 기본 카메라는 부담스러운 존재다.  


photo by. Rojoy


  기본적인 정보들의 입력을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페이지가 바로 '자기소개란'이다. 자기소개서를 썼던 것도 까마득한 옛날인데 오랜만에 쓰려니 뭘 써야할지 ‘대략 난감’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적으면 되려나? 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광고를 적어볼까.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그냥 이런저런 정보들을 적어본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리고 하는 일에 대해 적는다. 쓰다보면 어느 새 페이지가 가득 채워져 있다. 짧은 몇 마디로 대충 정리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대학 때 과제용 리포트를 제출하는 기분으로, 남들의 평가가 저조할까 두려운 마음으로, 이 정도면 내 좋은 점이 잘 보이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처음엔 나를 이렇게 꾸며 보인 적이 없어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모르는 이들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이랄까. 직업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라는 점 때문에 소개란을 채우는 게 왠지 낯뜨거운 일로 느껴졌다. 하지만 겨울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였을까, 자꾸 따뜻한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요상한 기대심리가 피어올랐다. 마치 동화 속 완벽한 왕자님이 나를 구하러 올 것만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반드시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게
잘못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대는 발칙한 상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좋은 사람이 있을 거란 희망은 언제나 유효한 게 아니다. 사실 인생에선 실망할 일이 더 많다. 그런 진실마저 망각해버릴 만큼 나는 망상에 빠져 허우적댔다. 아니야, 나는 달라.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 언젠가 반드시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될 거야. 그런 생각들로 상대에 대한 실망감을 태연한 척 이겨냈다. 자신은 직설적인 편이라며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부터 할말 없게끔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 최소한의 배려심과 예의 따위는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 천지였다.


A: 언제쯤 시간이 되시나요? 혹시 오늘은 안 되실까요?
나: 이렇게 갑자기는 좀 곤란한데, 다른 여유있는 때는 없을까요?
A: 저는 오늘 좋을 거 같은데, 그냥 친한 친구 집에 놀러왔다 생각하구 와요. 저 집에 간단하게 먹을 것들 있어요.

(저녁 7시쯤)
B: 저는 퇴근길이에요. 뭐 하고 있어요?
나: 저도 퇴근해서 집입니다. 집안일 조금 하고 있었어요.
(새벽 2시쯤)
B: 자고 있으려나요?
(아침 출근길)
나: 네. 그 시간엔 자고 있었어요.
(저녁 6시쯤)
B: 정신 없었네요 ㅋㅋ 퇴근했어요?
나: (데자뷰인가..) 네 퇴근하는 중입니다.


photo by. Rojoy


어느 별에서 왔니?


  애써 괜찮은 척 그들의 무례함을 견뎌냈던 나는 마침내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친절함을 쏟아내는 데는 에너지가 많이 든다. 불편함을 견디는 데에는 그보다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더 이상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모르는 이들과의 대화는 설레기보다 꽤 귀찮은 일이었고 때론 상처가 되기도 했다. 점점 남에게 나를 보이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나를 알아봐주지 않을 사람들, 스쳐 지나가 버릴 인연에 마음 쏟기보다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것만으로 이 결핍이 채워질 수 있으려나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손에 꼽는다. 대부분은 마음과 달리 어긋나고 뒤틀린다. 그래도 불평불만을 쏟아낼 수 없다. 운명이 내 편이 아니다 하며 자책을 하든, 조상을 잘못 만난 탓을 하든 그냥 넘기는 수밖에.


그렇게 나는 괜찮은 척, 살아간다.
내일은 부디 오늘보다 더 안녕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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