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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Feb 16. 2022

가볍게 쓰는 일기 02

오늘의 하루를 담다,

바쁜 나날이었다.


설 연휴 동안 열심히 책장을 넘겨보겠다는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알찬 하루를 보내겠다는 계획을 뒤로 하고 나는 거의 종일 침대에서 뒹굴었다. 따뜻했던 연휴 기간 동안 나는 잘 먹고 잘 쉬고 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쉬는 날은 금방 지나가 버리기 마련이다. 달리 한 것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연휴가 끝나고 드디어 첫 출근을 했다. 새로운 근무지, 낯선 곳에서의 새출발. 2021년 한 해를 유독 힘들게 지나 보냈던 나는 별다른 기대 없이, 오히려 걱정이 가득한 채로 집을 나섰다. 집에서 직장까지의 거리는 전보다 더 멀어졌다. 대중교통을 타고 1시간 40분이나 걸리는 거리. 지하철 텀을 고려하면 1시간 45분 내외라고 봐야 한다.


거의 두 시간에 가까운 출퇴근 시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관사를 들어가게 됐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낯선 동네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러웠는데 출퇴근도 여의치 않아 자취생활을 해야한다니.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오래된 아파트, 좁은 공간 그리고 모르는 이와의 동거. 급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해야하는 입장에서 설렘보다 불안함이 앞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3년 반을 기다렸다.


새로운 근무지로 재배치되는 시점은 매 3년 주기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나는 동기들과 함께 3년 반을 한 장소에서 발이 묶여 있었다. 옮길 것이라 믿었던 때에 옮기지 못하고 6개월 가량을 더 잔류하게 되면서 나는 심한 마음고생을 겪었었다. 다른 곳으로 진작 옮겼더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수시로 고개를 들었지만 달라지지 않는 상황에 절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삶을 롤러코스터라고 한다면 그 당시의 나는 끝도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처음엔 비록 실망했고 그래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새로운 곳에서의 삶은 꽤 만족스럽다. 사실 만족스러운 것을 넘어 조금 행복하다 느낄 정도다. 대하기 어려울 거라 지레 겁을 먹었던 내 룸 메이트는 예의 바르면서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같은 사무실 식구들 역시 좋은 사람들이다. 벽이 느껴지기보다는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이들이다. 참 오랜만에 만난 평화로운 순간. 집에 가면 엄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 같은 것은 없지만 방 안의 온기는 충분히 따뜻하고 가볍게 먹는 식사도 나쁘지 않다.


출처: zip deco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나날들이다.


힘들긴 했지만 1평짜리 작은 자취방을 꾸미는 것은 재밌었다. 처음 집을 떠나 독립을 하게된 바람에 아는 게 없어 이것저것을 찾아보느라 시간이 많이 쓰이긴 했지만, 텅 빈 공간을 나만의 쉼터로 꾸미면서 꽤 보람을 느꼈다. 덕지덕지 발라진 페인트와 들뜬 벽지, 그리고 낡은 창틀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은 방에 금세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방을 쓸고닦고 새로 산 가구를 조립하며 첫 일주일을 보냈고 모든 집기들을 들여놓고 나니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 화려하거나 아늑하게 잘 꾸민 이들이 수두룩 하겠지만 나에겐 소중한 첫 경험이었다. 나만의 독립 공간을 제대로 갖는 것 말이다.



무기력하게 지나갔던 하루들을 뒤로 하고 내디딘 첫 발은 가벼웠다.


처음 누워보는 이부자리가 불편하지 않을까, 치우는 거 순번을 정하려면 머리 아프지 않을까, 화장실 이용이 번거로운 게 아닐까, 혼자 밥을 챙겨먹는 게 서럽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은 기우에 불과했다. 책에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마음에 회사로 출근하는 발걸음이 한 없이 무거워서 힘들었던 때에 비해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사주 보는 이가 언젠가 얘기했던 것처럼 2월부터는 운이 트인것 같다.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좀더 걱정을 덜어낸 채로 지낸다.


긁히고 베인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는 것처럼,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따뜻한 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나에게도 봄이란 계절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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