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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Mar 24. 2022

꽃샘추위

트라우마 극복 일기 no.1

꽃이 피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기다림 끝에 낙이 있다고 결국엔 작은 꽃이라도 틔우지 않을까, 하염없이 마른 가지 끝을 바라보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꽃은 피지 않았어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꽃을 피울 힘이 없는 나무였다는 것을. 영양분도 수분도 부족해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서 있던 그런 나무였다는 것을.


너 인마, 그것 하나도 똑바로 못해?


  나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다. 그럴 의지조차 소멸한 상태였다. 버티지 못하면 낙오될뿐이라는 그런 말들에 떠밀려 칼날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힘들면, 못 버티겠으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멈춰 섰어야 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저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해, 그들 말마따나 ‘더한 병신’이 되지 않기 위해 모든 불합리한 상황을 견디고 답답한 마음을 감추는 것. 내 속이 곪아터져있는 건 생각조차 못하고 칼날을 들이미는 남들 앞에 애써 괜찮은 척 웃어보이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가 그런 것들이었다. 스스로가 병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 일거수일투족이 평가되는 곳. 그 속에서 내 자신은 처참히 부서지고 있었다.


그런데, 훗날 이 얘기를 들은 누군가가 내게 그러더라. 그거 가스라이팅이라고.


출처 중앙일보


  물론 그들의 주장대로 나는 틀려먹었을지도 모른다. 실수 연발에, 제멋대로인 사람. 자세가 틀려먹은 그런 놈. 그런데 악감정이 극에 달하면 왜 싫어했는지 그 이유조차 까먹게 되는 것처럼, 종국에는 그저 내가 숨쉬는 자체만으로도 껄끄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가 내 무덤인지 삶의 한 가운데인지 헷갈릴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는 건 나만이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씹고 뜯으며 즐기면 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 시간을 보내던 나는 결국 폭주하는 기관차가 되었다. 속에서 들끓는 울분에 휘감겨 어딘지 알 수 없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차라리 한 줌의 재가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병원에 가 본 적은 없지만 당시 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힘든 티를 낸들 알아주는 이 없는 삶 속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곧 이 지옥이 끝날 거라는 아주 작은 희망뿐이었다. 전근을 가게 되면 이 지옥은 벗어날 것이라는 사소한 희망만이 내 삶을 비추는 작은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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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버튼이 눌린다.
그럴 때마다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 때의 끔찍한 기억은 내 삶에 아주 큰 생채기를 남겼다. 잊을 수 없는 어두운 기억을 선사했다. 지금도 나는 그 기억으로부터 온전하지 못하다. 겨우 그 암흑에서 벗어난 지 2달이 됐을 뿐이다. 그 때의 사람들을 지금도 마주하고 있지 않기에 더 상처받을 일이 생기지는 않지만, 때때로 좋지 않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전에 같았으면 그냥 그랬나보다 하고 넘길 법한 일들도 쉽게 넘기지 못하고 마음 속에 담아둔다. 홀로 끙끙 앓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지만, 마음에 들어온 덩어리는 제멋대로 들어와서 슬그머니 자리를 차지하고 나더니 좀처럼 사라지지를 않는다.


  며칠 전에도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불과 지난 주의 일이다. 그럭저럭 웃으면서 보내고 있던 하루였다. 불쾌할 만한 일도, 걱정스러운 문제도 없는 평온한 하루였다. 전근 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 걸려온 전화. 생각없이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받았는데 날카로운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이렇게 일을 엉망으로 하고 간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감히, 네가 행복할 자격이 있느냐를 묻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일부러 업무 처리를 엉망으로 하고 왔다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욕을 먹는대도 콧방귀를 뀌고 말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나는 내 최선을 다했다. 그게 마음이 아팠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엉망진창이었단 평가를 받는 게 참 속이 쓰린 일이었다.


출처 한국일보


  오늘도 연락이 왔다. 친했던 동료로부터의 연락이었다. 나를 책망하는 이는 아니었기에 부담은 덜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연락이 온 것 자체에 신경이 곤두섰다. 스트레스가 치솟았다. 다행히 불안한 마음은 금방 가라앉았다. 주변에 함께 웃고 떠들 이들이 있어서 우울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무실을 벗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크게 동요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롯이 홀로가 된 순간 비로소 어두운 감정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옅어져도 그 불안함은 변함없이 마음에 자리하겠구나.


  그래서 버튼이 눌릴 때마다 그 감정을 글로 남기기로 했다. 마음이 힘든 걸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할망정 털어놓을 일기장 같은 건 있어야지 싶은 생각에서다. 그렇게 기록이 쌓이다 보면 불행하다 느끼는 감정도 희석되는 날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내일은 웃을 일이 좀 더 많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의 찌꺼기에 대한 고백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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