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활짝 피어날 나를 기대하며
볼을 살짝 스치는 바람의 온도가 제법 따뜻해졌다.
겨우내 자취를 감추었던 푸른 잎사귀가 나무마다 무성했다.
빗방울처럼 흩날리는꽃잎 사이를 거닐었다. 세상이 알록달록 색으로 피어나는 계절. 다시, 봄이 왔다.
누군가 그랬다.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봄엔 씨앗을 뿌리고 여름엔 땀흘려 푸른 잎을 일궈내면 가을엔 비로소 영글은 수확물을 얻고 겨울엔 다음 봄을 기다리는 거라고. 그런데 이상했다. 지구 온난화로 짧아진 봄과 가을처럼 나의 계절도 순식간에 뒤바뀌곤 했다. 자연의 섭리가 변하는 것처럼 내 인생에서도 달콤한 순간은 자꾸 짧아져 갔다. 씨를 뿌린듯 하다가도 몇 안되는 열매를 품에 안고 긴 겨울을 맞이하곤 했다. 매서운 겨울 바람에 코끝이 찡해진 적이 한두번이던가. 그렇게 나는 추위로 온통 색이 지워진 세상 속에서 다음 꽃 피울 때를 기다려 왔다.
“나 잠깐 쉴까 봐.”
“뭐? 무슨 일로?”
“아니. 그냥 일이 적성에 맞는 지도 모르겠고 해서.”
“얘는, 로또 당첨되는 일도 없으면서 괜한 소리를 해.”
점심 시간이 다되갈 즈음 옆자리 선배에게 대뜸 꺼낸 말에 한바탕 잔소리가 이어졌다.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하는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지 오래였다. 사실 이때쯤이면 꽃 피울 줄 알았더니, 결국 프로젝트의 성과물은 내 몫이 아니라 남의 차지였다. 지난 프로젝트에서 열심히 고생한 대가로 어쩌면 빠르게 올라갈 사다리를 얻지 않을까 기대했던 나는 얻어먹은 게 욕뿐이었다.
어쩌면 과한 욕심이었을까. 조금이라도 눈에 띄고 싶었던 알량한 욕심에 무리해서라도 잘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욕구를 잠재워 가며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던 거 같다.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선 조용한 희생이 필요한 것이지 요란한 영웅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소임을 다하고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다시, 겨울이 온 거다.
수확량은 노력과 절대 비례하지 않는다. 그게 겪어온 삶의 법칙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승진에서도 미끄러지더니 결혼을 생각중인 애인과는 연락 횟수가 줄었다. 허망한 결과에 마음 달랠 길이 없어 자주 퉁명스럽게 굴고 화를 냈던 탓인지 예의 다정한 대화 대신 썰렁한 안부만 주고 받을 뿐이었다. 눈발이 좀 휘날리는 줄 알았더니 진눈깨비가 내리는것 같았다. 포근하지도 반갑지도 않은 그 질척함. 마음도 질척질척한 진흙탕처럼 변했다. 온갖 구정물이 섞인것 같은 기분. 한 마디로 처참했다.
태양이 하늘에 머무르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일조량이 늘어서인지 조금씩 나쁨에 머무르던 기분은 상승 곡선을 탔다. 빨리 새로운 프로젝트에 몸 담아야 할텐데 어쩐지 다시 몸이 근질거렸지만 생각보다 기회는 포착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더욱 불안해져갔다. 곧 씨앗을 뿌릴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거다. 그러던 찰나 드디어 새로운 프로젝트에 합류할 기회가 생겼다. 이번엔 조용히 저력을 드러내리라. 설렘반 긴장반으로 시작선에 있었다.
“국내 31번째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이 확인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겨우내 새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발이 묶여 버렸다. 새롭게 구상해보려던 사업은 중단됐다.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채로 다시 시간은 흘렀다. 남자친구와의 만남도 일시정지 상태가 됐다. 남자친구가 일하는 회사가 입주한 건물에 확진자가 나왔다. 부쩍 늘어난 사회적 거리에 마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람과 부대끼는 게 싫어 혼자이고 싶었건만 정말 혼자가 되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냥 불안했다. 불꺼진 저녁, 달빛 아래 마른 안주에 맥주 한 캔을 들고 멍하니 달빛을 바라보다 잠에 들기 시작했다. 불 꺼진 하늘 아래 노니는 사람 없이 차가운 공기에 정적만이 흘렀다. 모두들 갇혀버린 세상이었다.
모두 저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희미한 표정마저 마스크 뒤에 숨겨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별일 없이 출퇴근하는 정형화된 일상은 내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막 노란 개나리가 봄의 시작을 알렸고 곧이어 벚꽃이 움트기 직전이었다. 세상은 더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었고 태양은 더 긴 시간 우리의 하루를 차지했다.
“지경씨, 다른 사업 부서로 옮기는거 어때? 그 쪽은 완전히 모든 일이 중단된건 아니야.
오히려 팀원이 좀더 필요해.”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해보지 않은 분야였지만 주어진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내심 기쁜 마음이었지만 애써 들뜬 마음을 눌러 담았다. 그렇게 긴장 속에 밤잠을 설치고 새로운 변화의 날을 마주했다. 낯선 사람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이질적인 것들에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아 괴로웠지만 이번에 손에 쥔 씨앗은 왠지 예쁜 꽃을 피울 거란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 정말로 바깥 벚꽃나무엔 꽃망울이 움트고 있었다. 이게 무슨 씨앗이든지 나는 예쁜 꽃을 피워내리라 하는 작은 각오를 다졌다. 어색하고 낯선 시작은 곧 익숙한 일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지루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다음 날이 기대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봄이 찾아왔다. 정말 특별하고도 새로운 봄이.
written date: 2020. 4월
**봄에 관한 자전적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