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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Aug 20. 2019

초등학생인 아들이 갈망하는 것

부모들이 잘 모르는....

#1.

  재량휴업으로 인해 "○○초등학교 휴업"이라는 문자가 왔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이유 불문하고 이 소식을 반긴다. 그저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학생일 때에는 학교에 가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마냥 싫다. 직장인인 경우에는 직장에 나가는 것과 일하는 것이 역시 싫다. 그렇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모든 인간은 학교와 직장을 싫어한다.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은 양심의 손을 들어 보시라...

     

  마냥 공부하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좋을까? 꼭 그렇지는 아닐 것이다. 놀고 즐기는 본능만큼이나 생존과 성장의 본능 또한 강하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교 학생인 아이에게는 생존을 위한 돈의 품격이나 자아실현을 통한 성장의 희열은 머나먼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다. 그냥 노는 게 좋다. 또래집단이 아니더라도 부모가 같이 놀아주면 좋으련만. 함께 놀아주다가 특히 다크서클 생긴 아빠들 많다. 아이들에게는 "놀이"지만 아빠에게는 "노동"이어서 그런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이들의 놀이에는 특별한 놀이도구가 없어도 놀고자 하는 마음과 공간, 시간만 있으면 된다. 더불어 마음에 맞는 친구가 몇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문제는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를 허용하는가 여부만 남는다.    

      



#2.

  아들이 여덟 살 때까지는 그림책과 동화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아빠가 봤던 와인 관련 만화책까지 여러 번 읽어서 누나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화장실에 가서도 30분은 예사로 책을 보고 항문질환을 걱정하는 부모의 얘기는 귓등으로 흘리곤 한다. 주말이면 학교 개방도서관과 작은 소나무언덕 도서관에서 각 3권씩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과정이 일과가 됐다. 좋아하는 책을 못 보게 한다는 것은 최고의 벌이 되었다.  아이들의 키가 커가는 만큼 호기심의 분야도 다양해진다.

    

  어느 날은 종이 접기에 빠져서 간단한 비행기부터 까다로운 동물 및 공룡까지 갖가지 사물을 종이로 접는 신공을 보여주었다. 신공의 결과물이 가는 곳은 늘 쓰레기통이지만 몰입의 과정에 더 만족하는 듯했다. 누나들의 레고 조각과 본인 소유의 레고 부속품으로 교본에도 없는 레고 작품을 만들어 아빠에게 보여주곤 한다. 아빠가 볼 때는 별 탐탁지 않은 놀이와 그 결과물이지만, 아들에게는 나름 심오한 작업의 결과물이거나 놀이문화로 보인다.     

 

  유튜브에 보면 종이 접기에 관한 동영상이 많다. 한동안 누나들 때문에 걸 그룹의 춤사위에 빠져있던 아들은 얼마 전부터 종이접기 동영상을 즐겨본다. 종이 접기가 비행기나 배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어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도 하나의 예술분야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물을 종이로 만들어내는 장인들이 있다. 특히 일본 쪽에서 이런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다. 그들의 개인주의적 문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으리라 생각된다. 아들은 한 시간짜리 동영상을 보면서 색종이를 비롯한 갖가지 종이로 자신의 작품을 만든다. 11월 첫 번째 주에는 학교에서 전시회도 연다고 한다.   

   

  우리 아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자전거를 늦게 배웠다. 본래 겁이 많아서인지 두발을 동시에 페달에 올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공포를 이기기까지는 자전거 뒤를 잡아주는 아빠의 거친 말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타고 다닌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과 골목길을 쏘다니며 라이딩을 즐긴다. 아빠랑 한강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신나게 타보는 것이 목표이긴 한데 아직은 무섭다고 한다. 겁이 많은 것은 아빠로부터 내려온 유전적 업보다.   

  

  요즘은 아파트 단지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이 있다. 부모가 어릴 적에는 학교 운동장에만 있었던 놀이도구들이 현관문만 열면 도착 가능한 공간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해가 지고 부모가 부를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사십 년 전에 우리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땅거미진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찾는 것은 짠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우리 아들도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갈 때까지 놀이터에서 오지 않는다. 다섯 살 터울인 유치원생 동생과 전혀 격의 없이 미끄럼틀과 시소를 탄다.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잘도 어울려 다닌다. 때로는 울고불고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형제애는 두 사람에게는 큰 자산이다. 부모에게는 그들이 보람이다.  

   

  아들은 방과 후 수업으로 바둑과 로봇공학을 한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본인 주장에 의하면 바둑을 상당히 잘 둔다고 한다. 그 그룹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하는 확인 불명의 뻥도 친다. 어찌 됐건 바둑을 배우는 것은 바람직하게 보인다. 바둑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고로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 한수 한수 두어야 하는 침착함과 다양한 수를 생각해야 하는 진지함까지 갖춰야 할 것이 많다. 로봇공학에서는 일종의 조립식 로봇을 설계하여 조립하고 해체하는 법을 배운다. 원하는 목적에 따라 로봇의 뼈대를 구성하고 전자칩을 고정시키고 이를 전자적으로 구동하는 것이다. 바둑과 로봇을 만들면서 아들은 지금까지의 놀이와는 전혀 다른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쓰지 않고 머리와 손으로만 두는 바둑과 로봇공학은 그 세계가 넓고 깊다. 앞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3.

  다양한 놀이문화에 푹 빠진 아들을 보면 아빠도 즐겁다. 이는 의무적으로 학원에 보내지 않고 특별히 배워야 할 과외활동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몰입은 아이에게 즐거움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진짜 흥미를 느끼는지를 알게 해 준다. 이렇게 무언가에 빠져드는 것이 놀이문화의 본질이고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시간들이 모여서 아이의 미래가 만들어진다. 


  아이들의 미래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의 시간을 여러 분야에서 스스로 탐색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의 성취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신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꿈"은 "직업"의 동의어 개념으로 사용되거나 유사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의 대부분은 직업에 관한 것이다. 우리 부모들조차 아이의 꿈이나 미래를 ‘직업을 위한 경쟁’이라는 분야에 한정시켜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놀이나 놀이문화는 아주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고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교양을 위해 피아노를 배우고 운동을 위해 태권도를 배우고 나머지 시간은 온통 학과 공부와 선행학습에 치중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 번쯤  아이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학교 공부와 학원 학습이 즐거운 것인가를. 그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그들의 우물쭈물하는 동작과 눈빛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번 감춰진 무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다. 아이들 스스로 그 공의 운동성과 방향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부모가 그 공이 함부로 튀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워 공에 실을 매달아놓는다면 그 공은 이미 아이의 것이 아니다. 부모가 아이의 동심과 호기심을 키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그냥 놔두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의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해 돌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것들이 부모가 해야 할 유일한 선택지이자 최선의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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