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가야 하는지,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다. 아빠랑 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살아온 경험치가 다르다 보니 대화가 마냥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퇴근 후 늦은 밤에도 거실에서 얘기를 나눴고, 딸은 서럽게 울기도 했다. 특별히 아빠가 대학을 가야 한다고 설득하지도 않았는데도. 아빠의 얘기가 자신에게 자신의 선택을 막고 다른 결정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까닭일까. 그 무엇인가가 딸의 가슴을 아프게 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두 사람의 결론은 ‘대학은 필요하면 가면 좋고, 굳이 갈 필요는 없다’였다. 그래서 큰딸은 밥벌이를 위한 여정으로 들어섰고, 지금 생각해보면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그때 아빠가 딸에게 물었던 한마디.
“한국사회에서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편견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처우가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할 거냐”
아빠의 질문에 딸은 가보지 못한 길이지만 별 문제가 안 될 거 같다고 했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 당시 딸의 대학 진학에 대한 입장은 단호했다.
“지금은 굳이 대학을 가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필요하면 직장에 다니다가 그때 가서 선택하겠노라고”
다시 돌아보면 어린 딸의 판단과 결정이 옳았던 것 같다. 그때 아빠의 입장도 “대학 무용론”의 입장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변함없다.
#2.
과연 대학 진학은 필요한 것인가? 대학을 가야 할까? 대학을 나오면 무언가 갖춰진 사람이 되어있을까? 대학에서 배우는 것들이 개인에게나 이 사회에 진정 도움이 되는 것일까?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부끄럽지 않게 생각을 하고 밥벌이가 가능한 사회는 어려운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가야 하고, 가지 않으면 ‘사람 취급’ 못 받을 것 같은 풍토 때문에 별 고민 없이 가버린 이들도 많을 것이다. 초중고 12년 동안의 결실이 대학 진학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오늘날 교육 이데아의 현실이다. 이 문제는 대학이 왜 존재하는지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나 여기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극히 적을 것이다. 아마도.
대학 진학률은 무엇을 의미할까. 2019년도 현재의 대학 진학률은 76.5%다. 고등학교 졸업생 10명 중에 7~8명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얘기다. 30%에 못 미치는 독일의 대학 진학률과는 정반대의 경우다. 그렇다고 독일의 취업률이나 삶의 질이 우리나라에 비해 떨어질까?
배고픔과 경제성장의 시대를 지나면서 대학 진학이 주는 메리트가 큰 세대가 있었다. 그때는 대학 진학률이 지금의 독일보다 더 낮았었기 때문에 대학 졸업장이 의미가 있었다. 그 시절 대학을 다니고 경제성장의 이익을 누리며 대기업과 안정된 직업을 구하게 된 것이 지금의 40~50대 부모들이다. 지금의 부모들에겐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로 대학 졸업장의 힘을 믿고 있다. 이른바 ‘적어도 대학은 나와야지’라는 대학 맹신론의 등장이다.
거기에다 우리의 현실은 대졸자와 고졸자 간의 비합리적인 차별이 넘지 못할 하나의 벽처럼 견고히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철옹성처럼. 독일의 경우 대학 진학률이 낮은 이유는 대졸자와 고졸자의 임금이 큰 차이가 없다는 데 기인한다고 한다. 맡은 업무나 경중에 따른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차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졸과 고졸의 임금차별은 대학 맹신론의 강력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우리도 이제, 이러한 차별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볼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3.
고도성장의 시간이 지난 다음 모든 환경이 변했다. 지금은 세계경제나 국내 경제나 모두 저성장의 시대이다. 경제성장기에 대학이 과도하게 많이 생겨났고, 대졸자의 수는 몇 배 증가했다. 대졸자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양질의 대졸자 일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대졸자와 고졸자의 임금 차이는 더 현격해지고, 그 차별의 정도는 심화되고 있다. 우리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이러한 차별은 시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저성장과 고용 절벽으로 인한 청년실업이라는 큰 벽이 가로막고 있는 현실이다. 대졸자 수만큼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 대졸자들의 소망과는 반대로 좀 더 안정적이고 편안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기업도 더 이상 일자리를 늘리지 않는다. 공무원으로의 진출 또한 엄청난 경쟁률의 홍역을 거쳐야 한다.
대학만 들어가면 취업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시대는 지나갔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졸업 후에도 끊임없이 직업탐색에 대한 걱정을 달고 살아야 할 시대가 왔다. 12년 동안의 공부가 대학에서 취업을 위한 공부의 계기로 전환될 뿐 더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공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봐야 되지 않을까). 지금은 서울시내의 어느 대학을 나오더라도 비슷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언론에 보도되는 각 대학의 취업률을 보게 되면 대학 졸업자들의 근심이 남의 일이 아니다.
취업 전쟁터에서 다시 학원이나 과외를 생각하는 대학생들의 비율이 늘고 있다는 보도는 이제 일상이다. 대학 진학이 공부의 끝일 줄 알았던 이들의 배신감과 현실로 인한 압박은 하나의 병리적 사회현상이 될 수도 있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도 다시 직업을 구하기 쉬운 직업전문학교로 재입학하는 추세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일찌감치 직업에 관련된 기술이나 기능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선택한 친구들이 더 부러움을 받는다는 얘기도 많다.
#4.
신규로 공직(9급 신규 공무원)에 들어오는 이들을 상담해보면, 대학에 재학 중인 이들의 고민이 깊다.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해서 졸업을 해야 할지의 문제다. 그런 고심을 하는 이들과 얘기해보면 둘 중 한 명은 대학을 그만둘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직업을 얻었으니 대학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면서. 평소 대학 무용론을 주장해온 입장에서는 그들의 결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어떤 선택이든지 본인의 몫이기 때문에.
대학에서 방황하는 대학생들이 늘고 있고, 직업선택의 걱정을 해야 하는 이들은 전공과 관계없는 구직활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학을 상아탑이나 낭만의 보고라 얘기하는 것은 전설의 영역이다. 또한, 대학 존재론(필요론)이나 대학 무용론 같은 큰 담론은 더 이상 이들의 생각의 대상도 아니다. 큰 그림은 오히려 지금 사회의 주축이 되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논의할 문제임도 불구하고 문제 인식이나 개선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지 못한다. 교육기회가 대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사회적인 성공을 가져온 세대이다 보니 그 학습효과가 자녀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세계경제나 한국경제의 팽창기에 구직 행위를 했던 386 ~ 586세대들은 나름 운 좋은 마지막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다시 그런 시대가 오는 것은 요원할 수 있다(개인적인 바람은 그렇지 않지만). 인구감소나 고용 절벽, 세계경제의 위기상황, 인공지능이나 자동화에 따른 산업구조의 개편 등 악재가 계속 겹쳐져있고 미래 진행형으로 남아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학 무용론이 가지는 시대적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대학이 단순히 취업의 전초기지에 머무른다면, 무한경쟁의 궤도로 진입하는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하다면 굳이 대학을 가야 할까. 우리 모두가 의미 있는 고민을 해볼 때다. 대학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삶을 위해서.
현재 밥벌이를 하고 있는 큰딸에게 아직까지는 대학 진학에 대한 후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다행으로 여기지만 좀 더 두고 볼일이다. 딸이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든지 간에 신뢰할 믿음은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