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보니 딸은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특히 시험 보기 하루 전날은 잠을 못 자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순간 딸에게 부모로서 특별히 해줄 것은 없었다. 누구나 거쳐야 할 성장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누구나 극복해나가야 할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이 순간을 참고 견더라"라고 얘기했어야 할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태생적으로 경쟁의 그라운드에 서기 싫어하는 이들이 많다. 단지 밥벌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티를 안 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운동경기를 할 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하기 싫어하거나 어쩔 수 없이 참여하는 이들이 있다. 적극적인 이들이 칭찬받고 소극적인 이들은 비난받아야 옳은 걸까?
조직생활이나 학교생활에서 개인의 성격이나 성향에 관계없이 집단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 공부와 운동, 개인의 취미활동까지. 그런데 그 뒤에서 성향이 왜곡되거나 공포를 느끼는 이들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런 태도에 대해 "소극적이다, 위험회피적이다"라는 부정적인 낙인을 찍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는 낙인찍는 데는 익숙하지만, 개인적인 특성을 개별화해서 차별화된 대우를 할 정도로는 성숙되지는 않았다. 어떤 분야든지 1등부터 꼴등까지 서열화해서 줄을 세운다. 이런 치열한 분위기에서는 경쟁을 피한다는 자체가 약자가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얘기를 한두 번 이상 들으면, 약자인 개인은 위축되고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는 동안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것이다. 자칫하면 겁쟁이가 되거나 루저라고 불릴 가능성도 있다. 특히 어린 시절에 아이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진실되지 않는 용기를 가장한 상황에 계속 노출되면 그 경험은 트라우마가 된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혹시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런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을까?
부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2.
사람의 성격유형을 내향적이나 외향적, 경쟁지향적이나 경쟁회피적으로 나누는 문제점은 혈액형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단정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76억 명의 인간을 혈액형을 기준으로 네 가지 성격유형으로 분류한다는 사실이. 지금도 누군가는 "당신은 B형 나쁜 남자인가요?"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무슨 의미일까? 사람의 성격을 두 가지 혹은 네 가지로 분류하고 그 기준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타당할까? 사실은 과학적 근거도 없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얘기다.
최근 서점가에서도 "내성적인 사람 또는 성격"에 관련된 책이 많이 보인다. 그 책들의 의도는 내성적인 혹은 내향적인 사람들이 가진 장점도 많아 여러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고, 그 나름대로 즐기며 살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 내용들이 내향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좋은 자극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또한 사람을 두 가지나 몇 안 되는 기준으로 나누고 박스형 비교를 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기 계발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각들.
"너는 이런 스타일이니까 이렇게 살아가면 돼. 너는 저런 성격은 아니니까 그렇게 살아가면 안 돼."
이런저런 포장은 하지만 어떡해서든 사람의 성격이나 삶의 틀을 규정하는 시각들. 우리네 삶이 이차원 방정식이 아니고 다차원 방정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듯이 한두 가지 기준으로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를 구분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그냥 사람의 머리수만큼 다양한 성격이 있을 뿐인데도.
많은 연예인들이 외향적으로 보이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인공포증이나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저 삶의 피로에 지친 개인적인 병리적 현상일까? 아닐 것이다. 그 개인들 속성마다 몇 가지 기준으로 분류하지 못할 다양한 캐릭터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성격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서로 다르다 보니 다차원적인 좌표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잘해도 피하고 싶은 것이 있고, 좋아하다 보니 피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고유의 특성, 개인이 처한 환경, 그때그때의 상황마다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옳을듯하다. 이런 다차원 방정식으로 개인과 문제를 풀어나갈 때 개인의 성격에 대한 오해나 착오가 사라질 수 있겠다.
#3.
개인의 성격평가기법이나 각종 지수도 심리학적 분석기법이지 그것이 개인의 성격분석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결국 이론적 평가는 성격이나 성향의 일부만을 설명할 뿐이다. 그래서 사회나 집단이나 부모가 개인(아이)의 성격이나 성향을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인가?
1) 우리는 개인을 어떤 특성으로 단정하는 것,
2) 그것을 통해 그 개인에게 부정적인 낙인을 찍는 것,
3) 나아가 그것이 그 개인의 성장 가능성을 저해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누구든지 극복해야 할 순간이 있고 회피하고픈 순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준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누구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극히 어려울 수도 있다. 제삼자적 입장에서는 그 순간의 본질을 피상적으로 살필 뿐이어서 객관성을 답보할 수도 없다. 부모라 할지라도 아이들이 마주하는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아이의 성격이나 성향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아이 성격의 단면만을 보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그런 상황은 주로 아이가 경쟁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시험을 두려워하는 때일 것이다. 이때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면, 부모는 "왜 당당하게 하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느냐"라는 반응을 보이는 게 대부분이다. 거기에 본인의 사회경험을 대입하여 아이의 부적응이 가져올 미래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되면, 부모는 잔소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경쟁에서 이겨야 뭔가 성취를 이룬 것으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경쟁을 싫어하거나 회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없다. 아예 소극적인 성격이나 부적격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게 일반적이다. 과연 이런 시각이 옳은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라면 우리 아이들이 이러한 성향을 보일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아이들이 이 같은 상황을 마주할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 부모들은 아이들이 경쟁 친화적인지 여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2)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이에게 경쟁이나 시험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그 상황에서는 부적합할지라도 아이 성향상 맞는 분야가 있는지 다양하게 탐색할 필요가 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생각보다 많다. 공부와 관련된 경쟁이 경쟁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 부모들이 살아왔던 것처럼 아이들의 앞에도 수많은 긴장과 경쟁의 순간들이 남아있다.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낼 것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 적합한 분야, 자신감이 솟는 영역, 자신을 필요로 하는 기회를 발견할 때 아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이 발현되는 것이다.
우리 딸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아빠, 제가 경쟁을 싫어하고 피한다고 해서 최소한 겁쟁이는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나요?"
중학생이던 그 딸이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제대로 한몫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 딸에게 아빠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 딸, 당연히 겁쟁이는 아니지. 오히려 자신의 성격대로 자신의 삶을 잘 꾸려나갈 줄 아는 용감한 사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