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결혼해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여자 동창의 얘기를 들었다. 보통은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아들이나 딸 얘기는 흔하지만, 친정엄마와 딸 사이가 서먹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괜한 의문이 들었다. 여동생이 둘이나 있는 집에서 엄마와 여동생들의 관계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왜 그 친구의 경우는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한 걸까? 과거의 시간에 어떤 상황이 있었길래 친정엄마와 딸 사이가 그럴까?
언제부터인가 친구가 말하는 '엄마와 딸'에 대하여 듣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가 경험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기 시작했다. 30~40여 년 전부터 최근까지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함께 했던 공감의 대상과 시간이 적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엄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한다. 몇 개 기억나는 것은 채무 관련된 경제적 어려움에 관한 것이 고작이다. 자영업자였던 가정의 특성상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밥상을 마주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혼자 밥을 먹거나 형제들과 같이 밥을 먹고 놀며 공부했던 기억이 전부다. 가장 중요한 밥상머리의 추억이 사라지다 보니 부모의 시간이 아이에게로 흘러가지 못한 것이다. 부모는 생계를 위해 바빴고, 아이는 부모가 필요한 시간에 부모의 빈자리만 확인했던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했던 추억의 개수나 대화의 횟수에 따라서 그 이후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결국 엄마와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작다 보니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도 따뜻한 대화는 물론 애틋한 감정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리라.
서로 대화의 주제가 달랐다.
가치관이 다른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살가운 공동체인 가정 내에서도 가치관의 다름은 어쩔 수 없다. 밥벌이와 경제적인 것이 주요 관심사인 엄마와 그런 엄마의 따뜻한 애정과 손길을 기대했던 딸의 결핍은 서로의 생각을 다르게 했다. 딸이 경험한 어린 시절의 엄마의 모습과 기대했던 엄마의 모습은 딸의 결혼 후에도 좁혀지지 않았다.
친정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딸은 그런 식의 생각을 가진 엄마가 여전히 불만이었다.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엄마의 처지는 안타까움 그 자체였지만 그렇다고 딸이 해결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만남과 대화에 있어서는 대화의 포커스가 맞지 않았고 겉도는 안부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양보하기도 해결하기도 힘든 가치관의 문제들.
각자 대화의 방식이 서툴렀다.
부모의 딜레마는 아이들이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 되었을 때 시작된다. 아이로 볼 것인지 어른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것들. 부모가 일정 연령 이후의 자녀를 계속 어리게만 볼 경우 벌어지는 문제는 심각하다. 캥거루도 아니고 그 자녀가 정신적인 독립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고 대화를 시도할 때 자식도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을 왜 모를까.
결혼 후 한참 후까지도 엄마는 딸을 어린애로 보았다. 가정사는 물론 대화에 있어서도 어른임을 인정해주는 대화가 아닌 부모 자식 간의 수직적인 관계임을 인정하는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친구는 그런 엄마의 태도가 불만이었다. 함께 하는 자리는 늘 불편했었고, 가능하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딸을 어리게만 보는 엄마의 시각과 그런 엄마가 불편한 딸의 시각이 공존하는 공간에서는 다른 가족들도 항상 불편했다고 한다.
#2.
"인간관계의 한계는 접촉의 한계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접촉의 기회가 많았다는 거다. 신체적인 것이거나 심리적인 것을 포함해서 접촉의 기회가 많을수록 관계의 폭은 넓고 깊다. 접촉은 어느 한 점이나 한 면에서 이루어진다. 당구공처럼 반드시 한 점에서 만나야 하는 경우도 있고, 찐빵처럼 오목 볼록을 나누며 만나는 경우도 있다. 누구나 당구공 같은 접촉을 희망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점이나 선을 넘어선 넓은 접촉면을 가지길 원한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업무상 만남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서로가 대면하기 때문에 한 점에서 접촉이 이루어지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는 접촉시간의 장단도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애정을 전제로 한 가족 간의 관계에서는 접촉의 면적이나 시간이 중요하다.
특히 가정 내에서 형제자매들끼리의 문제보다는 부모 자식 간의 접촉시간이나 접촉면이 문제가 많다. 많은 부모들이 밥벌이의 어려움 때문에 아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시간에 함께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게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상처가 되거나 서로에게 친밀감을 떨어뜨리는 주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는 것들. 지나간 시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고, 한번 멀어진 관계를 다시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우리는 서로가 접촉하며 부대꼈던 기억으로 그 이후의 삶을 살아나간다.
엄마란 단어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결혼한 여성들에게 있어 친정엄마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엄마라는 숭고한 단어에도 상처의 이력이 담겨있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 이후에 시월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여성들도 많지만, 오히려 친정식구, 특히 친정엄마와의 불화로 고통을 받는 여성들도 많다. 피를 나눈 가족들 간의 인간관계에도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만약 아내가 이렇다면 난감하지만 남편도 딱히 해결책은 없을 것이다.
친정엄마와 서먹서먹한 관계도 과거 경험의 산물이다. 어린 시절 엄마와 가정 내에서 부대끼는 시간이 적었거나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다는 얘기다. 서로 간에 공유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나 공감할 수 있는 대화나 그런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은 평생을 통해 부모 자식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부 경제활동 때문에 아이들과 밥상머리 대화가 부족했던 많은 부모들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후회를 마주할 가능성이 크다. 국과 찌개를 나누는 따뜻한 밥상의 대화가 생략된 부모 자식의 관계는 한참 뒤에 기나긴 후유증을 남긴다. 친구의 사례처럼. 서로의 이야기를 듣거나 상대방의 형편을 살필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던 까닭에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서로에게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공감의 시간이 부족하고 대상이 없는 까닭이다. 다시 좋은 사이가 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