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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Dec 09. 2020

노안이 찾아왔다는 아내의 말에 파도가 밀려왔다

와인은 시간을 말해주기도 한다.


친구들 모임에서 와인 몇 병을 들고나간 적이 있다. 절친이 하는 막걸리 집에서 와인을 먹는 것은 상도의에는 어긋나 보이나 친구들의 우의를 돈독히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와인 맛도 잘 모르는 친구들이 한두 모금 맛을 보더니... 두 눈을 토끼처럼 뜨고 와인의 알콜도수가 몇 도인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통상 레드와인은 12~14도 정도의 알콜도수를 가진다. 가져간 와인이 적정 가격대의 맛있는 와인인지라 친구들이 라벨을 살펴보면서 사달이 일어났다. 평소에 소주나 막걸리만 마시는 이들에게 와인이라는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어쩌다 마신 와인이 그들의 입맛을 당겼나 보다. 쥐꼬리 같은 호기심마저 살아났는지.


친구 1: "머시당가. 이 감칠맛 나는 와인의 정체는... 칠레산인듯한데(짐짓 아는 체하며), 도대체 몇 도인 거야... 음, 수줍은 건지 부끄러운 건지 딱 그것만 라벨에 없네."


친구 2: "잠깐 줘봐바... 안경까지 써놓고는 글씨를 못 읽으면 어떡하냐. 내가 봐볼게....(최대한 후기 인상파가 되어 한참을 이리저리 와인병을 돌리며 탐색하더니).. 라벨에 중대한 착오가 있네. 알콜도수를 빠뜨렸네."


친구 3: "머시여, 친구들의 눈은 악세사리여. 무슨 단추 구멍도 아니고. 꼭 공부 못하고 책 안 읽은 친구들이 눈도 나빠요.... 내가 곧바로 알려주지.(이 친구는 다른 친구보다 더 면밀히 와인병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라벨의 문구를 공부하듯이 여러 번 읽어보더니 하는 말)... 와인이 불량품이네... 하하하"(갑자기 기부자를 째려보더니 한마디 더 한다.)

"자네는 친구들 건강을 생각해서 좋은 와인을 가져와야지. 요렇게 자기표현이 불성실한 와인을 가져오면 어떡하나."


결국 참다못한 와인 제공자가 한마디를 뱉어냈다.

"여기 있잖아. 요 귀퉁이 밑에. 조금 작긴 하지만... 분명히 13.5%라고 되어 있는 게 안 보이나~~~"

다른 친구 한 명(친구 4)이 다시 용기를 내서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고 쳐다보더니 하는 말.

"노란 것은 라벨이고 검은 것은 글씨 같기는 한데.... 저것이 13.5라는 숫자라고라"


친구 한 명(친구 5)이 핸드폰으로 확대해서 찍어보더니 드디어 이 사태는 진정되었다. 공부 못하는 게 아니고 그저 하지 않은, 책 안 읽은 게 아니고 그저 읽을 시간이 없는 친구들의 사소한 시력 문제로 정리하며 모종의 합의를 보았다. 와인을 만들어낸 양조업자에게 원죄가 있다나 어쩐다나... 오! 주여~~


아무튼 10명이 모여서 와인병 라벨에서 알콜도수를 찾다가 9명이 못 찾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라벨의 알콜도수를 읽는 일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글씨가 문제의 발단을 제공했지만. 노안이 찾아온 이들에게 그 와인은 자신의 은밀함을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와인 특유의 볼륨감과 농밀함을 보여주었는지.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더 이상 알콜도수도 노안도 중요한 문제가 되지못했다. 유쾌한 밤 시간은 사공의 뱃노래처럼 흘러갔다.



몬테스 알파 엠은 칠레의 특급 와인 중 하나로 풀바디의 농밀한 매력을 가진 와인이다. 내 돈 주고는 사서 마시기 힘든. 물론 친구들 모임에도 가져가기 싫은. 혼자서 마실 예정인.
노안이 왔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와인병 라벨에 있는 개미 같은 글씨를 읽게 하거나 책이나 핸드폰의 작은 글씨를 30센티미터 안에서 볼 수 있는 가 여부다. 노안이 온 사람들은 깨알 같은 글씨가 보이지 않거나 깨져버린다. 팔을 펼쳐 멀리 두고 봐야만 비로소 글씨 형태가 나타난다. 노안의 철학적 의미가 나이가 들면 세상을 가까이서 (까칠하게) 보지 말고 멀리서 관조하라는 얘긴지.


동년배 친구들의 노안 소식은 자연적인 노화의 현상이려니 했다. 그냥 웃고 지나갈 해프닝 정도로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돋보기 안경이나 다초점 안경을 하나씩 구입하시게나... 농담처럼 말하면 되는 줄 알았다. 아직 노안이 오지 않은 입장에서는 그냥 특이체질이려니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내가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고 과자 포장지(아주 작은 글씨의 설명)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원래 저런 묘한 습관이 없었는데... 갑자기 안경을 선글라스처럼 올리는 게 유행인가. 저게 무슨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급히 아내에게 물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어설픈 동작의 의미를. 돌아온 대답은 그랬다.

"최근에 안경을 쓰고도 작은 글씨가 잘 안보이더라는... 그래서 안경을 벗고 멀리 봤더니 개미 같은 글씨가 선명하게 잘 보이더라는..." 대충 그런 얘기였다. 이런 된장... 친구들과의 <와인 라벨 읽기 사건>이 급 소환됐다. 친구들도 다들 몇 년씩 되었다던데. 벌써 아내가 그런 나이가 되었나. 가만히 아내와의 나이 차이를 손가락으로 헤아려봤다. 아뿔싸... 흔히들 노안은 40대 초반부터 온다는데... 이제 40대 후반 대열에 접어든 아내의 얼굴이 비로소 눈 안에 들어왔다. 언제 우리의 시간이 이렇게 되었을까.


가족의 건강문제에 대해서는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때로는 가슴 통증과 눈물이 먼저 반응하기도 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짠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일종의 짜증 같은 밀도의 안쓰러움이 쓰나미로 몰려왔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20대 초반의 대학 새내기 때부터 봐온 얼굴이 분명한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을까. 연애 3년과 결혼생활 24년이 그렇게 쉽게 흘러갔을까. 얼굴에 저 기미와 검버섯 또한 세월의 흔적인 것인지. 피부야 관리 못하고 화장 잘 안 하는 개인 책임일 수 있지만, 노안은 뜻밖이었다. 세월이 야속했다.


누구든지 젊음의 시간만을 간직할 수는 없다. 어릴 때 봐왔던 30대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은 할머니로 변한 것처럼. 어느 누구도 노화의 과정을 피해 갈 수는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 사람은 피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내의 노안을 바라본 감정의 실체는 그것이었다. 자연의 섭리로부터 예외를 허락받았으면 하는 안타까움. 이런 감정은 사랑일까. 아니면 여성호르몬 과잉의 갱년기 증상일까. 아무래도 후자 쪽이...


하지만 그런 안쓰러움이나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 곧 달라진 상황에 적응되었다. 설명서나 라벨의 작은 글씨를 볼 때 어김없이 올라가는 아내의 안경도 자연스러웠다. 짠함도 잠시 밀려왔다 떠나버리는 파도 같은 거였을까. 무심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허전하고 어찌할 수 없는 이 마음을... 그래서 우리의 삶은 신파에 가깝다.



이런 정다운 친구들의 모임은 코로나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이제는 기억만 남아있다... 아내의 노안과 더불어 안타까움에 짠함이 더해지는 세상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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