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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Sep 16. 2019

부모의 ‘난득호도’는 어려울까?

똑똑한 부모가 아이를 망칠 수도...

#1.

  주위를 보면 똑똑한 사람이 참 많다. 대학 졸업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온갖 분야에 박사들과 전문가들이 널려있다. 덕분에 어리석어 보이는 이들이 적어져서 세상은 각박하고 웃을 일이 없어진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조금 더 현명해지고, 개인들의 세상살이는 더 나아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똑똑함이 세상을 망치거나 개인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치가 존재할 것이다. 극히 일부를 안다고 해서 그 이상의 일부나 전부를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일부 (헛)똑똑이들은 자신만의 잣대로 세상을 좁게 해석하고 그들만의 언어로 세상을 평가하곤 한다. 그래서 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선한 타인들은 피곤하다.    

  

  정판교의 ‘바보경’에 ‘난득호도(難得糊塗)’란 말이 있다.


이는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똑똑한 사람이 그 똑똑함을 드러내지 않고 어리석은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얘기다. 물론 중국의 특정 시대에 지식인들의 생존전략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 시대에도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약간 어리석은 삶의 양태를 보이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의 현명한 처신이 있었다는 얘기다. 자기 자신은 어리석음으로 치장하고 타인의 똑똑함을 치켜세워주면 세상의 주목에서 타인의 경계에서 벗어나 위험한 상황을 마주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난득호도가 가진 의미는 지금 이 시대에도 유용할까?

우리의 아이들을 잘 자라게 하고자 하는 부모들에게 쓸모 있는 지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2. 부모의 난득호도  

   

  서점에 가보면 부모들을 위한 육아나 양육방법에 관한 조언서가 넘쳐난다. 수많은 부모들이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부모를 위한 자기 계발서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들을 바라본다. 자신들의 육아 철학이 좀 더 현명해지기를 바라면서. 육아전문가들이나 자녀를 키워본 경험서에 의하면 누구나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도 가진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실제로 그러한 책을 저술한 전문가들이나 저자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처럼 한다면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난득호도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감출 수 없는 똑똑함의 본능과 관계있다.


  부모가 어른이라는 기준과 인생선배의 잣대로만 아이를 바라보고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각종 부모를 위한 양육서나 전문가들의 지혜를 빌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아이들은 행복할까?

      

  부모의 난득호도를 뒤집어보면. 똑똑한 부모의 처세가 아이를 망칠 수도 있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때로는 부모가 총명함(?)을 내려놓고 한발 물러서서 아이들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문제가 되는 상황이 있더라도 모르는 것처럼 하는 게 오히려 아이와 부모를 편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더 나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부모가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대화하게 되면 아이의 속마음은 어떨까?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다 알고 있어’이런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를 보면 숨이 막힐 것이다. 아마 성인들도 마주치기 싫어하는 눈빛의 전형이 아닐까? 하물며 아이들은.   

        



#3. 난득호도로부터 배우는 지혜    

 

  우리의 아이들을 부모의 머리로 키우는 게 현명할까? 부모의 가슴으로 키우는 것이 지혜로울까? 물론 정답은 없다.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도 가능하지만. 이미 우리 부모들은 알고 있다. 냉철한 머리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과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차이를. 그 차이가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세상을 먼저 살아본 부모 입장에서 아이들이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은 상황도 많다. 하루에도 열두번.

 

왜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 밖에 못하나.
왜 저 나이에 저런 생각밖에 못할까.
 
인내심이라는 것을 어디다  팔아먹고 쉽게 포기하는 허약체질만 남은 걸까.
인생은 다 때가 있는 법인데, 기가 막힌 타이밍을 놓치고도 천하태평일까.
 
중고등학교 6년만 고생하면 앞으로 인생 30년은 편할 텐데.
왜 저럴까, 바보처럼. 왜? 왜?

지금 내가 고생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왜 부모 말을 안 듣고 맨날 핸드폰에 게임만....



 이런저런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아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으로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기도 한다.  

   

  아이의 시행착오를 줄여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벗어나 신세계로 이끌고 싶은 것이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다. 내 아이는 좀 더 똑똑하게 절대 실패하지 않는 길로 안내하고픈 마음 또한 부모의 본능이다. 이 헬조선에서 패자부활전이 없다는데, 내 아이만큼은 영원한 승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 내 자식이 좀 더 편하게 살아가게 하고자 하는 부모 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들조차도 알고 있는 것이 스스로 경험한 게 전부 아니던가? 우리가 세상의 많은 이치를 깨달으며 살아오지 않았듯이 우리가 생각하거나 알고 있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런 시도가 아이의 독립심을 저해하고 아이의 선택과 결정 과정에 장애요인이 되어서 아이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설령 부모의 생각이 일정한 품격을 갖췄다 할지라도 그 생각까지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이러한 부모의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언하고 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우리가 우리 부모로부터 간섭 없이 살아왔듯이 우리의 아이들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더라도 부모가 살아온 세상이 있고,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따로 있는 법이다. 우리가 십 대 때 우리의 부모로부터 지금 우리가 아이들에게 보내고 있는 눈빛을 느끼며 살아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부모에게 근심과 걱정을 마음껏 제공했던 한때 철부지였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자신의 힘과 상상력으로 부모들보다 더 풍부한 세상을 맛보고 경험하며 살아가야 한다. 지금의 우리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럼에도 부모인 우리가 자신만의 기준으로 아이들을 재단하려고 할 때 사건사고는 발생하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걱정해도 아이의 고난을 대신해 줄 수도 피하게 해 줄 수도 없다. 만약 그런 마법이 있었다면, 누가 인생의 고행 길에서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겠는가? 특별히 자신의 아이가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다는데...   

   

  그래서, 부모들은 똑똑하게 보이기보다는 조금  어리숙하게 보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이의 행동이 좀 맘에 안 들더라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 모르는척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이들이 부모를 만만하게 보거나 우습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가 똑똑함과 현명함을 보일 수 있는 상황은 얼마든지 널려있으니까. 모든 부분에서 그러지 마시란 얘기다.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냥 똑똑해 보이는(혹은 보이고 싶어 하는) 부모인가? 만약 그런 부모라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강박을 갖고 자신의 아이를 대하살아가고 있는가? 아이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어 하며, 어떤 부모를 마주하고 싶은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인가?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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